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김동원
은행나무의 발밑이 온통 노랗게 물들었다. 사실 알고보면 은행나무가 한두 잎이 제 이파리를 떨어뜨려 채색한 것이다. 은행나무의 그림은 형상이 없어도 좋다. 가을이 되면 은행나무는 색, 오직 그것 만으로 그림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은행나무는 매년 그 색으로 노랑을 선택한다. 이제 물릴 법도 하건만 은행나무의 노랑은 올해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 김동원
가끔 하늘이나 자연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오늘은 하늘이 시커멓다. 내 마음처럼 암울하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 시커먼 하늘의 한가운데 푸른 하늘이 주먹만큼 남아있다.

ⓒ 김동원
사실 시커먼 구름은 하늘의 일부에 불과하다. 걸음을 몇 걸음 옮기고 고개만 돌리면 나무와 하늘, 그리고 언덕의 능선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금방 우울한 채색을 벗어버린다. 그 두 풍경이 내 눈앞에 동시에 있었다. 인생도 그럴 것이다.

ⓒ 김동원
한 나무의 잎은 노랗고, 한 나무의 잎은 빨갛다. 하늘은 파랗다. 구름은 희다. 누가 조합한 것도 아닌데 색들은 조화를 이룬다.

ⓒ 김동원
한 그루가 아니라 두 그루이다. 저렇게 큰 것을 보면 아마 아주 오랫동안 저 자리에서 마주보고 살았을 것이다. 언듯보면 하나지만 그러나 분명 두 그루이다. 그러나 자신할 수 없다. 혹 하나의 뿌리를 두 개의 줄기로 나눈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은 자꾸 하나로 보였다.

ⓒ 김동원
언덕의 풀섶 위에 눈썹만한 달이 하나 걸려있었다. 오늘의 저녁은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달빛에 물드는 시간이다.

ⓒ 김동원
설악산에 갔을 때는 산의 곳곳에 가을이 내려와 있었다. 도시의 공원에 갔더니 그곳엔 가을이 담겨있었다. 원래 도시에는 가을이 오지 않는다. 도시가 서면 가을의 자리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 사람들은 가을을 담아둘 작은 그릇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을이 왔을 때 그 그릇에 가을을 담아둔다.

ⓒ 김동원
문명은 편리하다. 하지만 그곳엔 시간따라 자연스럽게 얼굴을 바꾸고 다시금 생명으로 일어나는 순환의 움직임이 없다. 자연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곳엔 그냥 보기만 해도 우리의 시선이 전율하게 되는 원초적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들은 그 둘을 동시에 누리려고 한다. 공원 옆에 호텔을 지은 뜻도 그러할 것이며, 경치 좋은 곳에 어김없이 들어서는 찻집들도 그런 욕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으로 갔을 때면 그냥 자연만 있고 문명의 편리함은 없었으면 좋겠다.

ⓒ 김동원
달은 자연이다. 하지만 달이 자연이 아닐 수도 있다. 이원은 <1999 달의 운행 계획>이란 시에서 자연이 아닌 달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시인은 그 자연이 아닌 달을 얘기한 자신의 말을 "무골질의 은유"라고 했다. 뼈가 없는 은유란 뜻이다. 나는 언젠가 그에 관해 쓴 한 편의 글에서 그 뼈가 서정성이라고 말했다. 그가 시인이니까 당연히 그를 지탱하는 가장 중심적인 뼈대는 서정성이다. 이제 세상은 과학의 힘으로 지탱되는 것 같았는데 시인은 세상의 뼈대가 사실은 서정성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동조할 수 없다면 달을 보고 눈물 지을 수 없는 세상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런 세상은 살기 어렵지 않을까.

ⓒ 김동원
멀리 공원의 저편에서 비행기 한 대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잠시 달을 올려다보며 눈물 짓던 나는 퍼뜩 이곳이 문명의 한복판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비행기도 내 눈물에 물들었다. 눈물에 물들면 문명도 자연이 될 수 있다. 비행기가 요란한 날갯짓과 함께 내 머리 위를 지나쳐 사라졌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했다. 블로그-->김동원의 글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카메라를 갖고 돌아다니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때마다 사진을 찍고 그들의 말을 전한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