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때문"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건 바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때문이에요. 화성 건설의 모든 과정과 소요 자원 등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한 공사보고서인 의궤가 있어서 훼손됐던 화성의 모습을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거든요."
| | | '의궤'와 '능행 반차도'는 무엇? | | | | '의궤(儀軌)'는 중요한 의식이나 과제에 대한 모든 내용을 정리한 것을 말한다. 기록 문화로 특히 조선에서 꽃을 피운 의궤는 막강한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후세의 평가 자료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정조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능행 반차도(陵幸 班次圖)'는 63면의 그림으로 김홍도를 비롯한 당시 화원들이 그렸다고 전한다. 반차도는 행사 전체 상황을 그린 그림인데, 규모도 규모지만 행사 중간 식사에 사용한 그릇, 음식재료, 밥상장식 등 세밀한 부분까지 기록돼 있는 것이 눈에 띈다. | | | | |
홍 대표는 건축학 전공을 살려 '화성' 자체에 주목해 '화성의궤' 콘텐츠 개발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히 화성이 국가 부역이 아니라 노무비를 지급하고 정약용의 거중기가 사용돼 건설됐다는 사실은 혁명에 가까웠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홍 대표는 개발을 진행하면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담긴 정조의 행차 이야기를 추가했다고 덧붙였다. 화성과 정조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인식에서다.
'화성의궤' 개발 이유를 묻자 홍 대표는 "문화는 앞마당처럼 편하게 거닐고 부대끼며 느껴야 하는데, 수원 화성이 바로 그런 경우"라며 "매년 축제를 통해 역사와 문화를 시민들과 함께 즐기는 수원의 '화성'은 그 자체가 강한 생명력을 지닌 문화콘텐츠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화는 딱딱한 텍스트와 역사 기록만으로 강조하는 것보다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추고자 노력할 때 빛을 발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미디어가 콘텐츠에 가지는 자부심은 이해할 만하다. 실제 <화성성역의궤>와 <원행을묘정리의궤> 등에 담긴 내용은 딱딱하지만, 웹사이트를 통해 제공하는 '화성의궤 이야기' 콘텐츠는 한 눈에 쉽게 들어온다.
| | |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 | 정조가 꿈 꾼 신도시, 화성 | | | |
| | ▲ 화성의궤 이야기에는 능행 반차도, 의궤 등에 나오는 그림이 많다. 사람 하나하나의 위치와 직책 등을 기록함은 물론 그 방대함에 놀라울 뿐이다. | ⓒ포스트미디어 | '화성의궤 이야기'에는 인물(정조), 사건(행차), 배경(화성) 등 소설 구성의 3요소가 담겨 있다. 이는 인문학을 바탕으로 산업적 요소도 갖춘 문화콘텐츠라는 점에서 개발 의미가 크다.
정조이야기… '미완의 개혁정치가'
정조는 조선 제22대 국왕으로서 세종대왕 이후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칭송 받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정조대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1752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나 국왕의 운명을 받았지만,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1776년에 영조가 서거함으로써 당쟁의 와중에서 어렵게 25세의 나이로 국왕에 즉위해 24년 동안 탕평책을 실시하고 규장각을 설치했으며, 군제를 개혁하고 행정과 경제를 개혁하는 등 수많은 치적을 쌓았다. 1800년 49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떠남으로써, 조선을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미완의 개혁정치가'로 역사에 남았다.
행차이야기…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의 묘소를 화산(花山)으로 이장한 후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의 묘소)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했다.
행차이야기는 을묘년인 1795년 현륭원에 행차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를 벌이고 돌아온 8일간의 장대한 행사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바탕으로 구성됐다.
정조가 현륭원을 참배한 것은 모두 13회이고, 한번 행차 때마다 거의 85건의 민원이 처리됐다. 이는 정조의 화성 행차가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주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시흥, 과천, 화성 일대 주민들의 민정을 직접 시찰, 민원을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차이야기는 이러한 행사 진행을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이동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도록 구성했다.
화성이야기…신도시 건설
40대 중반으로 원숙함을 더해 가던 정조는 친위 세력의 결집과 재정의 안정, 자신감을 바탕으로 초월적군주상을 펼쳐 보일 시기와 장소 그리고 기회를 찾았다. 이것이 바로 '화성(華城)'이라는 신도시의 건설로 나타났던 것.
화성건설은 1789년에 준비를 시작해 1794년에 착수, 2년 반 뒤인 정조 재위 20년이 되던 1796년 가을에 완료됐다.
수원은 육로 및 해상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는 서울을 지키는 남방의 요새였다. 수원은 북(북한산성, 대흥산성), 서(강화도성, 문수산성), 동(남한산성)과 함께 서울의 남쪽을 방위하여 서울 외곽방어체제를 완결했다. 정조는 수원에 서울과 비슷한 5위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화성의 위상을 수도에 버금가는 왕도로 간주했다.
(자료 출처 : 포스트미디어 '화성의궤 이야기') | | | | |
전통 문화 보존 위해 문화콘텐츠 지원해야
홍 대표는 인문학과 디지털콘텐츠가 만나서 개발된 '화성의궤 이야기'로 사업적인 재미를 볼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교육적인 면에서는 활용 가치가 높다고 강조했다.
"화성의궤 콘텐츠를 개발하면서 수원 화성을 수없이 오고 갔어요. 화성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교류를 통해 인문학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이 큰 성과예요. 학교 강단에서만 논의되던 정조의 화성 이야기를 생활사 측면에서도 인식하게 해 대중화한 것이 그것이죠."
홍 대표는 "대중문화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전통문화를 만들거나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전통문화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문화콘텐츠를 개발하고 홍보하는 데에 학교교육, 학자연구, 시민단체활동, 박물관지원 등이 병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문화콘텐츠 개발의 의미를 묻자 홍 대표는 대중과 함께 하는 콘텐츠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지역 중심의 문화콘텐츠 개발에 주목하며 "정조와 화성이라는 거대한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수원은 축복 받은 곳"이라며 "문화콘텐츠는 화성처럼 지역을 중심으로 발굴해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미디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포스트미디어가 개발한 '화성의궤' 이야기에서 다음 세대의 문화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정조가 꿈꾸던 수원 화성도 역사를 비춘다는 점에서 그 역할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덧붙이는 글 | ㈜포스트미디어 '화성의궤 이야기' 콘텐츠 자료 열람
http://www.culturecontent.com -> 문화원형관 -> 화성의궤 이야기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