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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 그리움 가득한 가을! 가을이 그 문을 닫기 위해 눈물 흘리던 날 바람과 함께 곱게 물들었던 단풍이 휘날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잎새를 남기며 더 아련한 가슴앓이를 위해서 잎새비는 하염없이 내리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저 비 그치고 겨울을 예고하는 찬바람 불면 그 많던 단풍잎도 다 떨어져 길가엔 낙엽이 소복이 쌓이며 숱하게 거니는 사람들의 발자국들을 더욱 정겹게 맞이하겠죠.
그런데 매일처럼 직장에 다니며 피곤해 하는 아내에겐 이러한 저의 생각도 어찌 보면 사치일 거라 괜히 미안함이 앞섭니다. 벌써 결혼 20주년을 향해 힘차게 치닫고 있는데 서로에 대한 마음보다는 애들과 내 생활만을 위해 매진해 오다보니 아내의 자리는 어느새 구석에 뒤처져 있습니다.
"아내를 위해서 내가 시간을 내어주고 함께 했던 게 얼마나 될까?" 자문해보니 또렷한 기억이 없는 듯합니다. 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표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나만의 이기적 삶을 살아오며 합리화시키기에 급급했던 거 같습니다. 이제 불혹을 넘어 지천명으로 향해 가는데 화살같은 세월을 느끼기엔 아직도 젊은가 봅니다.
뭔가 마음 속에라도 여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늘 못된 나를 버리지 못하고 나만의 아픔에 매달려 나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건 지나친 자학은 아니겠지요. 그런 저런 생각에 아내에겐 늘 미안함만이 앞섭니다. 고정적인 소득을 안겨다주지 않는 남편에게 이렇다할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내조하며 살아오다 결국 자신 스스로 직업전선에 나서게 된 건 제게도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아내와 소통하기 위해 지난 일요일엔 빗방울이 뿌려대는 쌀쌀한 날씨인데도 늦가을 정취를 모처럼 느껴보기 위해 나섰습니다. 이곳저곳 여러 장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대부분 다녀본 곳이라 오늘은 전혀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떠올린 곳이 한국관광공사에서 '10월의 가보고 싶은 곳'으로 추천한 순창군 동계면의 장구목입니다. 장군목이라고도 하고 장구목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지역에 저희는 스무살 시절에 느낀 상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발을 내디딥니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가는 초입부터 비포장도로가 반겨줍니다. 이 도로가 정말 맞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데 조금 들어가다 보니 범상치 않는 기운이 느껴집니다. 가을비에 젖은 도로는 온통 흙탕물로 우릴 반깁니다. 앞에 가던 군내버스에서 여러 사람들이 내립니다. 모두 양손에 한 보따리씩 들고 내리는 걸 보니 오늘이 순창 장날인가 봅니다.
마을 어귀에서 내려 걸어가시는 모습들이 아련한 추억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서글픔과 함께. 섬진강 강변들도 때 묻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어느 곳 하나 제방을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 보이지 않습니다. 관광자원화 하기 위하여 포장도로를 개설하느라 정신없는 건설현장의 모습이 조금은 낯섭니다.
수석처럼 놓인 바위더미들이 물과 어울려 기막힌 장면을 연출합니다. 세월의 깊이를 바위에 새기는 물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이래서 예로부터 물을 도학의 근원으로 알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대상으로 선택했나 봅니다. 얼마의 세월이 흘러 저리도 아름다운 바위물결을 만들었을까요?
물은 더욱 희한하게도 거대한 바위 한 가운데를 지름 70센티 정도로, 깊이가 어른 키 만할 정도로 깔끔하게 뚫어 놓았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을까? 석공이 다듬어 놓은 것보다 더 아름답게 물은 바위를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놉니다.
이 바위와 관련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바위 이름은 요강처럼 생겼다 하여 '요강바위'로 불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해 전 욕심 많은 어떤 사람이 이 바위를 훔쳐간 거죠. 동네에서는 이 바위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고 그러다가 경기도의 한 지방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급기야 법정투쟁까지 나서게 되었다 합니다.
다행히도 법정은 마을사람들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제 자리로 옮기기 위해 물경 당시 돈으로 500여 만 원을 거두어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하니 마을사람들의 요강바위에 대한 애정은 남다릅니다. 함께 공유하면 더 아름다운 것을, 끝내는 사유하려는 욕심이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경치에 취하고 물에 취하다보니 어느 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가까이 있는 장구목 가든으로 향합니다. 겨울채비를 벌써 한 듯 식당은 비닐로 덮여 있습니다. 조금 허름하기도 하고 여름철에나 한몫 챙기는 유원지 식당의 하나로 느껴져 음식 맛이 얼마나 있을지 적이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데 막상 기다리던 음식이 나오니 "어~ 이거 예사 솜씨가 아니네"하며 집사람이 반깁니다. 맛깔스럽고 깔끔하게 나온 반찬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연이어 나오는 음식들이 정말 즐거운 마음이 절로 나게 만듭니다. 아주 예쁜 단풍잎을 쑥갓과 함께 튀김으로 해 왔는데 맛있게 보이고 예뻐서 사진 찍을 여유도 없이 먹고 말았습니다. 서로 얼굴 보며 그럴 여유도 없었냐는 묵언의 교감을 갖습니다.
메기탕도 개운합니다. 문득 집사람이 메기탕은 냄새가 나고 비릿하다며 먹지 못했던, 제가 처음 데리고 갔던 메기탕 집을 떠올립니다. 그러던 아내가 지금은 이렇게 잘 먹습니다. 메기탕 속의 추억을 곱씹으며 깨끗하게 음식을 다 비우는데 이번엔 단호박전이 나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색깔인지 거기에 대추를 곱게 썰어 무늬를 내고 쑥갓잎을 함께 얹어 조화를 이뤄냅니다. 이른바 가을에 먹는 화전입니다.
정말 모처럼 맛나게 먹고 일어서려니 꽃차가 나오는데 그걸 기어이 드시고 가야 한다면서 다시 자리에 앉힙니다. 무슨 꽃차인지 물어보니 목련꽃과 산동백이라네요. 차 맛을 보고 꽃잎을 보더니 집사람이 "이거 생강나무꽃이네!"합니다. 들꽃들과 가까이 하러 다닌 지 몇 년째,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던 집사람이 생강나무 꽃도 압니다. 앞으론 더욱 함께 다니려고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당신만 아는 거 아냐. 나도 알어! 그러니 앞으로 혼자 다니지 말고 같이 다녔음 좋겠어"하는 말로 들립니다.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두 개의 다관에 나온 목련차와 생강나무꽃 차를 마시니 차가운 날씨에 몸이 따뜻해지고 풀립니다.
진한 향기에 반해 생강나무꽃 차를 조금 구할 수 없을까 하고 물었더니 바쁜 와중에도 포장을 아름답게 해주는 주인네의 손길에서 따스한 정을 느낍니다. 붉게 익은 찔레 열매로 포장의 마지막을 수놓으며 하시는 주인네 말씀, "가시다가 찔레열매 빠지면 그거 사모님 귀에 꽂아 주세요" 합니다. 첩첩산중 산골마을에서 늘 접하며 사는 자기만의 아름다운 미학이 이렇게 발휘됩니다. 그리 고운 마음 가지고 식당을 하시니 음식이 좋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름다운 마음들을 고이 접어 가슴에 담아 돌아 나오는데 "내년 봄에 오시면 진짜 생화로 수놓은 좋은 음식들이 나옵니다. 같이 화전놀이 하게 오세요"합니다. 우린 내년 봄을 기약하며 다시 강변을 따라, 임도 같은 산길을 따라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며 돌아옵니다.
더욱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듯 단풍잎은 곱게 물들어 달리는 차창으로 하염없는 손길들을 내밀고 있습니다. 서로 서로 이렇게 손잡으며 따스한 체온들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덧붙이는 글 | 순창에서 접근시 24번 국도를 타고 남원방면으로 가다가 괴정삼거리에서 동계방면으로 좌회전합니다. 첫 번째 삼거리에서 괴정교 건너서 좌회전하면 비포장 도로가 나옵니다. 이후 장구목가든 이정표를 따라 가면 장구목이 나온다. 호남고속도로 태인IC에서 빠져서 30번 국도를 타고 순창방면으로 가다 섬진강댐을 지난 삼거리에서 강진방면으로 갑니다. 강진삼거리에서 동계방면(717번 지방도)으로 가는게 빠른 길이라 합니다.
대중교통: 장구목으로 가는 버스편은 없다. 순창에서 동계행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넘게 걷거나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