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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고구마 한 박스가 부쳐져 왔습니다.
딸에게 주는 것이라면 쌀 한 톨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시는 부모님답게 박스를 칭칭 동여맨 노끈에는 육십 년 어부만의 노하우가 진하게 배어 있었습니다. 고구마를 보자 회가 동한지 배가 고프다며 방방 뛰어대는 아이들을 위해 우선 가장 굵은 놈으로 두 개를 썰어 튀김 옷을 입혀서 기름에 튀겼습니다. 그리고 윗집, 옆집 문을 두드려 이웃을 불러 모아 커피 한 잔을 벗삼아 나누어 먹었습니다.
입 안에 들어간 고구마는 살살 녹는다는 표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지만 공으로 받아먹었다는 죄송함 때문인지 먹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자꾸만 무거워져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드린 것도 없이 받기 만하는 이 어미의 마음을 아는지, 뜨겁다고 "호호 후후" 고구마를 불어 대는 아이들은 오만 가지 표정으로 제 마음의 짐을 덜어 주었습니다.
제가 살던 고향집에서는 찬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는 이맘때쯤, 봄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수확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고향 들머리에 있는 밭에서는 해마다 고구마 농사를 짓습니다. 늙은 부모님은 또 며칠 해를 등에 업고 그 많은 고구마를 캐셨겠지요.
어릴 적 고구마 캐는 날이면 하나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가난한 집의 딸이던 저였지만 그날만은 맥없이 기분이 좋아지곤 했습니다. 고구마 순을 일일이 거둬 내고, 누렁이가 쟁기질로 갈아 엎은 이랑에서 고구마를 줍는 일은 유난히 체구가 작았던 제게는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날이 좋았던 건 주워 올리는 고구마 중 제일 맛나게 생긴 녀석을 두 개도 좋고, 세 개도 좋고 제가 배가 부를 때까지 호미 등으로 착착 깎아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가끔은 다 먹지도 않은 고구마로 돌팔매를 던지는 호기를 부릴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몇 날을 다섯 식구가 고생해서 거둬 들인 고구마는 작은 방 한구석 천정에 닿을 만큼 쌓였고, 엄마는 그 고구마를 이용해 겨울 내내 요리를 하셨습니다. 비가 오거나 날이 꾸물거리는 날은 고구마 튀김을 해 주셨고, 입맛이 없으면 고구마 죽을 쑤셨고, 잠이 쉬 오지 않는 밤이면 군고구마를 해 주셨고 출출해 하시는 아버지를 위해서는 찐고구마를 해 주셨습니다. 별미로 나오는 고구마 밥에 고구마를 채썰어서 함께 무친 톳나물까지….
그 중에서도 단물이 줄줄 나는 고구마를 살얼음이 내려앉은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입에서 침이 고입니다. 고구마 한 개를 먹일 때도 행여 체할까, 입이라도 데일까 싶어 불어 주고, 등 두드려 주고, 닦아 주고, 떠먹여 주시던 그 엄마가 생각나서 저도 맥없이 아이들의 등을 토닥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시절의 저처럼 "엄마, 왜 그래?"라며 의아하게 쳐다보네요.
그 모습에 그 옛날 다 식어서 말라비틀어진 고구마만 드시던 그 엄마를 추억해 봅니다. 지금의 꼭 제맘 같았을 그 엄마를 이제는 같은 엄마로서 추억합니다.
엄마, 당신도 당신 목구멍보다는 고구마가 자식들의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가 더 듣고 싶었던 거겠지요. 노란 고구마를 "호호, 후후" 불어가며 먹는 아이들의 그 모습에 행복을 느끼셨던 거겠지요.
고구마를 받았다는 전화를 드리는데 아버지는 "부지런히 묵어라. 집이 고구마 많이 쟁여놨다! 나가 딴거는 몰라도 우리 새끼들 겨우내 군음식은 책임질란다, 긍께 딴생각 허지 말고 맛나게 묵어라. 맛나게 묵어 주는 것이 효도다. 알었지야?"하십니다.
오늘 낮에는 군고구마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아버지를 생각하며, 엄마를 생각하며 맛나게 먹어 주는 것도 효도라는 아버지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참으로 맛나게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