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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웃음이 나오네" 근심이 사라진 탓인지 2년 전보다 훨씬 젊어지신 심복순(73) 할머니. 할머니는 헤어스타일을 짧은 단발로 바꿔 멋있어 지셨습니다. 2년전(아래) 이 맘때 만난 심복순 할머니는 복받힌 설움에 끝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인자 웃음이 나오네" 근심이 사라진 탓인지 2년 전보다 훨씬 젊어지신 심복순(73) 할머니. 할머니는 헤어스타일을 짧은 단발로 바꿔 멋있어 지셨습니다. 2년전(아래) 이 맘때 만난 심복순 할머니는 복받힌 설움에 끝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 광주드림 안현주
할머니의 주름 살이 활짝 펴졌습니다. 2년전 눈물만 글썽이던 심복순(73) 할머니는 카메라가 다가서자 "아이구 뭣을..."이라며 손사래까지 치시며 환화게 웃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심복순 할머니는 더 젊어진 것 같습니다. 헤어스타일도 더 멋져보입니다. 마음이 부자가 되서 그럴 겁니다.

진곡동 산31-2번지  한국전쟁의 상흔이 드리워졌던 피난민촌에는 구청서 달아준 주소 표지만 빼면 멀쩡한 살림살이가 별로 없었습니다.
진곡동 산31-2번지 한국전쟁의 상흔이 드리워졌던 피난민촌에는 구청서 달아준 주소 표지만 빼면 멀쩡한 살림살이가 별로 없었습니다. ⓒ 안현주
하늘 높은 여느 가을 날, 2년여 만에 다시 찾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진곡동 산3-21번지에서는 '막걸리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2년후에 벌어진 막걸리 잔치 2005년 늦 가을, 스산하기만 했던 피난민촌에 웃음 꽃이 피고, 온동네 막걸리 잔치가 벌여졌습니다. 어려움을 함께 하면서 주민들은 한 식구가 됐습니다.
2년후에 벌어진 막걸리 잔치 2005년 늦 가을, 스산하기만 했던 피난민촌에 웃음 꽃이 피고, 온동네 막걸리 잔치가 벌여졌습니다. 어려움을 함께 하면서 주민들은 한 식구가 됐습니다. ⓒ 광주드림 안현주
'산3-21번지'에는 지난 50년 한국전쟁의 또 다른 상흔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이른바 '피난민촌'입니다.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세월따라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룬 곳입니다.

사람이 떠나고 들어오면서 8가구만이 모여 살고있는 주민들은, 어느 순간 '남의 땅에 무허가'로 들어와 살고 있는 '부랑민' 신세가 된 듯 했습니다. 당장에 먹을 것도 걱정인데 언젠가는 쫓겨나야 한다는 불안감이 주민들을 눈물짓게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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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보도] 버려진 땅, 광주 진곡동 산31-2번지

피난민촌의 아리랑

사연은 이렇습니다.

우린 어디로 가나 주민들은 정부가 민간인에게 땅을 팔아버린 사실을 뒤 늦게알고 정부에 건의문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도 얻지못했습니다. 심복순 할머니 댁 누렁이는 외지인을 만나 즐거웠는지 꼬리를 흔들어댔었는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새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우린 어디로 가나 주민들은 정부가 민간인에게 땅을 팔아버린 사실을 뒤 늦게알고 정부에 건의문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도 얻지못했습니다. 심복순 할머니 댁 누렁이는 외지인을 만나 즐거웠는지 꼬리를 흔들어댔었는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새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 안현주
한국전쟁이 끝난 후 월남 피난민들이 이 마을에 모여든 것은 1954년. 당시 이승만 정부는 피난민 구호대책으로 국유지에 초가집 한 칸씩을 마련해줬습니다.

그러던 중 박정희 정권 초기 부족한 국가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는 국유지를 민간인들에게 매각하기 시작하면서 피난민촌도 어느날 팔려버렸습니다.

산3-21번지 역시 민간인 소유로 넘어간 것 입니다. 주민들은 땅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됐습니다. 정부가 피난민촌 주민들에게 한 마디 통보도 없이 땅을 넘겨버린 것입니다.

가을 햇살은 따스했지만...  하늘은 높고 햇살이 참 좋았던 2003년 가을, 피난민촌 주민들의 마음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사연을 듣기 위해 왔다는 말에 동네 사람들이 마을 앞 공터에 모였습니다. 박진규(오른쪽)씨는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을 햇살은 따스했지만... 하늘은 높고 햇살이 참 좋았던 2003년 가을, 피난민촌 주민들의 마음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사연을 듣기 위해 왔다는 말에 동네 사람들이 마을 앞 공터에 모였습니다. 박진규(오른쪽)씨는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안현주
영문도 모른 채 불법건축물에서 살게 돼버린 주민들은, 비가 새는 양철지붕 하나도 땅 주인의 허락 없이는 손도 대지 못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이들의 걱정이 더 심해진 것은 2001년부터 였습니다.

소유주가 집을 뜯어내라며 마을을 둘러 울타리를 치는가 하면, 2003년 경매로 이 땅을 인수하게 된 새 주인은 주민들을 상대로 점유이전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습니다. "남이 이 땅을 차지했다는 것을 알고 피난민들이 (정부에) 진정서를 올렸지만"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기자 양반! 잘 좀 부탁드립니다"  2년전 취재를 마친 기자가 발걸음을 돌리자, 주민들은 마을 입구까지 쫓아나와 '잘 부탁한다'는 인사말을 몇 번이나 건넸습니다(아래). 피난민촌 한 켠에 환하게 피었던 봉숭아(위).
"기자 양반! 잘 좀 부탁드립니다" 2년전 취재를 마친 기자가 발걸음을 돌리자, 주민들은 마을 입구까지 쫓아나와 '잘 부탁한다'는 인사말을 몇 번이나 건넸습니다(아래). 피난민촌 한 켠에 환하게 피었던 봉숭아(위). ⓒ 안현주
2003년 10월 그 날, 마을 어귀에는 그렇게도 이쁜 봉숭아가 활짝 피었지만 심복순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거릴 뿐이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기자가 만능해결사나 되는 것처럼 생각했는지 주민들은 마을 입구까지 배웅하며 "잘 좀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건넸습니다.

피난민촌 사라진다... 새 집 지를 땅이 생긴 주민들

피난민촌의 아리랑  주민들의 사연이 알려지자, 그 해 12월 5.18기념문화회관에서 문화단체들이 '피난민촌 아리랑'이란 주제로 아카이브 전시회를 마련했습니다. 버리진 땅, '진곡동 산31-2번지'가 관심의 땅이 된 것입니다.
피난민촌의 아리랑 주민들의 사연이 알려지자, 그 해 12월 5.18기념문화회관에서 문화단체들이 '피난민촌 아리랑'이란 주제로 아카이브 전시회를 마련했습니다. 버리진 땅, '진곡동 산31-2번지'가 관심의 땅이 된 것입니다. ⓒ 안현주
주민들의 사정이 처음으로 외부에 알려지면서, 이 곳은 관심의 대상이 됐습니다. 그 해 12월에는 문화단체들이 '피난민촌 아리랑'이란 주제로 아카이브 전시회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이들의 사정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 2년.

2년전 마을 입구에 화사하게 피어있던 그 봉숭화처럼, 2005년 11월 심복순 할머니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피난민촌은 이제 사라질 처지입니다. 그러나 이들 8가구의 주민들은 크게 걱정이 안됩니다.

마냥 즐거운 주민들 2년전과는 사뭇 달라진 주민들의 표정에서 흐뭇함이 느껴집니다.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은 피난민 가족인 문수복(60)씨네 가족(위). 문씨는 요즘 손주들 재롱에 시간가는 줄 모릅답니다.
마냥 즐거운 주민들 2년전과는 사뭇 달라진 주민들의 표정에서 흐뭇함이 느껴집니다.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은 피난민 가족인 문수복(60)씨네 가족(위). 문씨는 요즘 손주들 재롱에 시간가는 줄 모릅답니다. ⓒ 광주드림 안현주
이들에게 새 집을 지어서 살 수 있는 '자기 땅'이 생긴 것입니다. 주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살펴준 소유주 김윤섭씨, 관할 구청과 주변의 도움으로 피난민촌 바로 옆 '산 323-9~20번지'가 주민들의 땅이 된 것입니다. 김윤섭씨가 산31-2번지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대신 자신의 땅인 이 곳을 무상으로 제공해 준 겁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이 땅에 주민들은 새 집을 지을 겁니다. 날씨가 추워지는 12월부터 집을 짓기 시작하겠답니다. 날씨가 추울텐데 좀 걱정스럽습니다. 그래도 "그런 것이 문제겠냐". 세상을 다 가진 듯 마냥 미소가 머금어 집니다.

물론 피난민촌 주민들에게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활이 넉넉치 못한 탓에 새 집을 지을 비용이 걱정입니다.

'고사'도 지내고... 주민들은 새로 집을 지를 터에서 고사를 지냈답니다. 고사를 지내던 날, 땅을 무상으로 기증해준 김윤섭씨가 일어서자 주민들이 감사를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위). 2년전에는 모이면 한 숨만 내 쉬던 이들이 이제는, 그냥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는 모양입니다.
'고사'도 지내고... 주민들은 새로 집을 지를 터에서 고사를 지냈답니다. 고사를 지내던 날, 땅을 무상으로 기증해준 김윤섭씨가 일어서자 주민들이 감사를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위). 2년전에는 모이면 한 숨만 내 쉬던 이들이 이제는, 그냥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는 모양입니다. ⓒ 광주드림 안현주
하지만 서러웠던 세월을 생각하면 이제는 행복한 걱정거리가 됐습니다. 주민들은 지난 11월 10일 새 집을 지를 터에서 고사도 지냈답니다. 그리고 막걸리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다음 날도 주민들은 남은 음식을 핑계삼아 한 상 차렸습니다. 2년전 처음으로 자신들의 사연을 세상에 알린 <오마이뉴스>가 고마웠던지 당시 취재진을 자신들의 잔치 상에 초대했습니다.

오늘만 같았으면...  주민들에게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빠듯한 살림에 집을 지를 여유 돈이 걱정스럽기는 합니다. 이들에게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만 같았으면... 주민들에게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빠듯한 살림에 집을 지를 여유 돈이 걱정스럽기는 합니다. 이들에게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광주드림 안현주
이 분들의 활짝 핀 미소가 너무 좋아보입니다. 피난민촌 주민들의 삶이 오늘만 같지는 않겠지만, '눈물만 글썽거려야 하는' 세월이 이제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안현주 기자는 광주드림 사진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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