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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행궁에 자리하자 병조판서 김병주가 옆에서 왕에게 계품했다.

"이제 수조를 시작하겠사옵니다."

"그리하도록 하시오."

"초선(哨船)을 내겠사옵니다."

김병주가 말을 마치자 선전관이 발초선 호령(發哨船號令)을 내렸다. 신포(信砲) 한 발이 발사되자 초계선이 나섰다. 이어 주선이(主船)이 솔발을 올리고 각 선이 열을 지어 첨자찰(尖字札)을 만들었다. 반대편에도 가상 적선이 진을 형성했다.

아침 해가 은비늘을 만드는 한강에 어느새 크고 작은 병선들이 가득 찼다. 한양 성내외의 백성들이 운집하여 간만에 눈 보양을 하느라 아직 그치지 않은 비는 안중에도 없었다.

숙정 호령(肅靜號令)이 나자 숙정패와 표미기(豹尾旗)를 세운 주선이 신포 소리에 맞추어 기를 세운 후 세 번 끄덕였다. 각 선이 차례대로 모두 끄덕이기를 마치자 징이 그쳤다. 이어 신포 한 방이 울리고 북소리와 함께 오방기, 고초기가 끄덕이며 첨자칠진이 일제히 앞으로 움직였다.

"어허~장관이로세."
"조선에 저런 수군이 있기는 있었구먼."

구경하는 백성들 사이에 이런 저런 탄성이 나왔다. 주상의 행궁과 거리를 두고 대원군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말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턱을 괴고 먼발치 강에서 벌어지는 진용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주변의 문무대신들도 이런 묘한 분위기 탓에 덩달아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주상이 행차하지 않았다면 경기 수영과 훈련도감의 주도 아래 대원군을 위한 수조가 되었을 것인데 저 옆에서 병조판서와 주상이 손발이 맞아 버티고 있으니 그의 심중이 어떠하리란 걸 아는 터였다.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던지 대원군 옆에서 천희연이 말을 건넸다.

"대감과 주상저하의 선정 아래 저렇듯 수군의 위용이 대단하니 이제 양이의 넘봄도 끝입니다요."

대원군이 천희연을 멀뚱히 쳐다봤다.

"자네가 진정 저 조각배들이 이양선을 대적하리라 생각해 하는 말인가? 아니면 농으로 그러는 게야?"

천희연의 표정이 머쓱해졌다. 저렇게 진 짜기에 급급한 배들이 과연 이양선 근처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었지만 그냥 비위를 맞추느라 한 말인데 오늘은 대원군이 그런 말을 받아줄 기분이 아닌 듯했다.

말하는 사이 초선이 신포를 쏘아 경보를 알리고 주선이 이에 응해 신포를 쏘고 북을 치며 파대오(擺隊伍)나팔을 불자 모든 배가 일자진(一字陣)으로 벌려 모의 적선을 맞았다. 적선이 200보 안으로 다가오자 제 각각 포를 쏘고 천아성을 불었다. 먼저 낭기, 조총, 화전을 쏜 후 적이 30보 안으로 들어오자 적선을 향해 공격하는 대형으로 한참을 뒤엉켰다.

실제 포환이 날지는 않았지만 포성이 울리고 화약 연기가 하얗게 한강을 뒤덮은 현장에서 모두의 시선이 수조에 매인 채 뗄 줄을 몰랐다. 주상의 주변을 에워 싼 무예별감들마저 재밌는 구경거리에 넋을 빼었다.

그때 대원군 아랫 발치의 구경꾼들 중 하나가 계속 대원군의 진막을 흘끔거리며 맞은 편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맞은편 사내가 흉터 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모로 저었다. 애초 약속한 때는 지금이 아니건만 강의 광경에 모두가 한 눈을 팔고 있는 때라 조바심을 내고 있는 동패의 행동이 몹시 염려스러운 듯했다.

'지금은 안 돼. 성공을 한다 해도 의뢰인과 약조한 때가 아니니 퇴로를 확보할 방도가 없다.'

흉터 난 사내는 눈에 힘을 주어 다시 한 번 맞은편 동패를 말렸다. 수군의 조련에 정신이 팔린 듯 하면서도 연신 구경꾼들을 훑던 더벅머리 엿장수가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엿장수의 짚신에는 은행만한 매듭이 묶여 있었다. 엿장수는 머리가 가려운 듯 연신 정수리께를 긁어댔다. 대원군의 진막과 거리를 둔 왼쪽에서 조용히 구경하던 도포차림의 사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의 눈짓에 맨상투 하나가 구경꾼들을 가르고 천천히 엿장수가 가리킨 사내에게 다가갔다.

"와아아아!"

한강 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모의 적군이 패하여 물러나자 수군의 각 전선에서 힘찬 함성을 내지른 것이었다. 전신(轉身)나팔을 불고 신기(神旗)를 돌려세우자 각 전선들이 돌아서서 정렬했다. 징이 울리고 대취타에 맞춰 각 선이 나란히 운항하여 영(營)이 있던 원래의 위치로 옮겨와 열을 지었다. 다시 군중에선 술렁거림과 잡소리들이 흘러나왔다. 흉터 난 사내가 한 번의 기회를 넘겨 보냈다 생각하며 시선을 옮겨 맞은편 동패에게 주었다.

'엉? 이 녀석이 어딜 간 게야.'

흉터 난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맞은편에서 자신을 재촉하던 사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혹여 단독으로 행동하는 건 아닌가 해서 걱정스럽게 대원군의 진막 쪽을 올려다 봤다.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흉터 난 사내가 다른 수하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그는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그 사내 사라진 동패를 찾는지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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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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