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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임동원(오른쪽), 신건 전 국정원장이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입장하고 있다.
15일 오후 임동원(오른쪽), 신건 전 국정원장이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입장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재구

뒤죽박죽이다. 국정원 도청으로 임동원·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이 구속된 이후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두 전직 국정원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되었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측은 '무도한 일'이라고 비난했다.

자신의 재임기간 동안 국정원의 정치사찰용 도청이 이루어졌음이 드러났음에도, 그는 '사실이 아닌 일을 억지로 만든 것' 이라며 여전히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국정원의 도청행위가 계속된 데 대한 책임은 간 곳이 없고, 도청 책임자들 구속에 대한 울분만이 토로되고 있다.

김대중 정부 아래에서 자신에 대한 도청이 있었음이 알려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도 '무도하다'는 비난을 하고 나섰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안기부 미림팀이 도청을 하던 시기의 대통령이었다. 도청에 대한 책임으로 치자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몇 배는 될 것이다. 그런 그가, 김대중 정부의 도청사건은 '아주 큰 일' 이라며 'DJ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다.

물론 규모와 질은 다를지 모르지만, YS쪽은 DJ쪽을 도청했고, DJ쪽은 YS쪽을 도청한 꼴이 되어버렸다.

그런가 하면 열린우리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고, 당내 율사출신 의원들은 두 전직 원장에 대한 변호인단을 구성하기로 했다. 구속적부심을 신청하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쯤 되면 여당이 국정원 도청행위의 변호자가 되는 모습이다. 그 뒤에 숨은 정치적 사연과 고민은 백번 알고도 남지만, 도청행위의 단죄를 외쳐야 어울릴 열린우리당은 국정원 도청행위의 변론을 해야될 판이 되어버렸다. 도청에 대한 단죄보다 '김심(金心) 달래기'가 우선하는 상황이다.

오히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의 불법도청 행위에 대해 "국가기관이 앞장서서 자유민주주의를 짓밟은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두 전직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듯하다.

혼란스럽고 어지럽다. 국정원이 정치사찰용 도청을 한 사실보다 그같은 행위를 밝혀내고 단죄한 일이 문제거리가 되는 상황이라면, 이는 분명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다. 정치적 고려와 판단에 밀려 정상적인 가치가 붕괴해버리는 현상이다.

대체 판단의 기준이 무엇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6일 오후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한 한화갑 민주당 대표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6일 오후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한 한화갑 민주당 대표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이희열
도대체 판단의 기준들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두 전직 원장의 구속 이후 정치권이 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바탕에는 'DJ의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DJ의 분노'가 국정원 도청파문에 대한 판단과 가치기준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 무엇이 본질적인 문제인가.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사이의 갈등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전·현 정권 사이의 갈등은 어디까지나 당사자들의 문제일 뿐이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국가기관에 의한 반(反) 인권적 도청행위의 실상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같은 범죄행위를 어떻게 근절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선적인 의제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역사적 견지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정치인들이라면, 지금의 상황에서 무엇이 본질인가를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

이 핵심적인 문제를 젖혀놓고 전개되고 있는 전·현 정권 사이의 갈등론은 본질을 흐리는 '물타기'일 뿐이다. 또한 양쪽의 갈등을 부추겨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노림수가 작용하는 경우까지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하고 있는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김 전 대통령이 가질 수 있는 정서적 반발을 이해못할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와의 형평성에 대한 문제제기도 충분히 근거있고, 꼭 두 사람 모두 구속시켜야 했느냐는 이의제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항의표시에 앞서 그가 해야할 것은, 당시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국정원 도청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일이다. 자신의 재임기간 중 일어난 잘못된 일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는 모습이 우선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이의제기도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도청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미 대단히 구체적인 도청의 실상들이 드러났고, 임동원 전 원장 조차도 '책임을 통감한다'는 이야기를 했음에도, 김 전 대통령은 요지부동이다. 두 전직 원장을 신뢰한다는 이유로, 드러난 도청의 실상을 부정하는 것은 억지주장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DJ, 더이상 논란의 원인 제공자 되어서는 안된다

김 전 대통령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해주어야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도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DJ의 분노'에 노심초사하며 동교동 대변인이 된 듯한 말만 쏟아내는 집권여당의 모습, 그리고 도청에 대한 사법적 단죄를 가지고 '정치적 음모' 운운하며 나서는 민주당의 모습이 얼마나 보기 민망한지를 생각한다면, 김 전 대통령은 더 이상 논란의 원인제공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남북정상회담을 실현시켰고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기간 중 아들과 측근들의 문제로 난맥을 빚기는 했지만, 그래도 민주주의와 한반도평화를 위해 한생을 바친 거목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한 정파의 좁은 지도자처럼 처신할 이유가 무엇인가. 국정원 도청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접근방식은 보편적 상식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과오가 발견되었다면 겸허히 인정하고, 큰 흐름 속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일 때 그는 변함없이 거목으로 우리 곁에 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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