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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매체들은 정체성에 대한 아무 정의 없이 '사회지도층'이라는 불특정한 특정집단을 사회의 상층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사회를 '사회지도층'과 '그 밖의 무리들'이라는 안경을 통해 보기를 암묵적이지만 습관적으로 강요하였다.

"사회지도층의 자제", "사회지도층의 문화", 심지어는 "1800명 사회지도층 무차별 도청" 등 대중들에게 우리 사회를 지도하는 사회지도층이 엄연한 실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여 왔다. 내가 "찍지"도 않았지만 나의 표를 포함시킨 "국민가수", "국민배우"를 만들어 냈듯이 매체들은 사람들의 동의와 무관하게 불특정한 특정집단의 실존적 지도력을 공공연하게 강조해왔다.

이렇게 불특정 하던 사회지도층의 실체가 드디어 드러났다. 그것도 대중들이 불특정한 사회지도층에 특정하게 요구해왔던 청렴성이라는 주제를 매개로.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는 전문여론조사기관인 TNS에 의뢰하여 전국 1500명의 일반인과 200명의 전문가들을 상대로 사회지도층의 청렴성에 관한 설문조사(95% 신뢰수준에 오차한계 ±2.5%)를 실시하였다.

사회지도층? 돈, 능력, 권력보다는 도덕성

매체들이 사회지도층에 대해 언급할 때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먼저 떠올릴까? 엄청난 부, 높은 학식, 고상한 가문? 아니다. 사회지도층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연상되는지 물었을 때 가장 많은 41%가 도덕성을 연상하였으며 그 다음으로 권력(37%)을 떠올렸다. 경제력을 연상한 사람은 7%에 불과했다.

별도의 정의 없이 사회지도층이라 했을 때 사람들은 돈보다는 도덕성과 권력을 먼저 떠올린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해서 "CEO형 지도자"와 같이 사회지도층에 대한 대중들의 요구가 변화했다는 일부 매체들의 주장과 달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사회지도층을 도덕성과 연관시키고 있다.

ⓒ 김정수
과연 그렇다면 능력 있는 지도층과 청렴한 지도층 중에서 사람들은 어떤 지도층을 더 선호할까? "덜 청렴하더라도 능력이 있는 사람과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청렴한 사람 중에 누가 더 바람직한 사회지도층이라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69.4%는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청렴한 사람"이 바람직한 사회지도층이라 대답하였고, 청렴보다는 능력을 선택한 응답자는 26.6%에 불과했다.

재미있는 것은 정치, 공공, 경제, 시민사회, 학계, 언론계 6개 분야 전문가 200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경제계 전문가들이 시민단체에 이어 두 번째로 능력보다는 청렴한 사회지도층을 선호하였으며, 언론계 전문가들의 청렴한 사회지도층에 대한 선호도가 가장 낮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 지도층 청렴도의 현주소 4.85점

그렇다면 한국사회 지도층의 청렴도를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보고 있을까? 정치, 경제, 언론, 법조는 물론 교육, 종교, 체육, 연예계를 포함하여 모두 12개 부문의 사회지도층의 청렴도를 10점 만점으로 했을 경우 한국사회 지도층의 평균 청렴도는 4.85점으로 보통 미만이었다.

ⓒ 김정수
가장 청렴도가 낮은 집단은 예상가능하게도 정치권으로 2.43점에 불과했다. 경제계가 3.99점으로 그 뒤를 이었으며, 법조계 4.58점, 연예계 4.64점, 언론계 4.79점, 교육계 4.99점 순으로 나타났다. 가장 높은 청렴도를 보인 종교계의 경우도 5.79점에 불과했다. 12개 부문 중 7, 8점 이상의 높은 청렴도를 보이는 부문은 전무했다.

사회지도층의 청렴도가 이렇게 낮은 상황에서 국민들의 사회지도층에 대한 신뢰가 높을 수 없다. 사회지도층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66.6%, 그리고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15.5%로 무려 82.1%가 사회지도층을 불신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인사청문회 하면 10명 중 8명 통과 못해

일반인들은 사회지도층의 청렴도가 자신들보다 낮다고 생각하고 있다. 단지 1.8%만이 사회지도층의 청렴도가 자신들보다 높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65.5%는 사회지도층의 청렴도가 자신들보다 낮으며,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31.8%에 불과했다.

주변을 둘러볼 때 그나마 사회지도층의 청렴도를 간접적이나마 공개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국회의 인사청문회라는 제도가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는 총리인준을 둘러싼 국회인사청문회에서 줄줄이 미끄러진 사회지도층의 모습이 생생하다.

고위공직 후보자의 도덕성과 자질을 검증하는 국회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는 깨끗한 사회지도층이 1백 명 중 몇 명이나 될 것인지에 대해 국민들에게 물어 보았다. 응답자의 압도적 다수인 59.1%가 20명 미만의 숫자를 언급하였다. 전체적으로 1백 명 중 단지 22.6명만이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 김정수
국민들이 사회지도층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부패는 뇌물 수수(31.4%), 부동산 투기(17.6%), 비밀정보를 이용한 불건전한 재산 증식(15.5%), 탈세(13.2%), 청탁 및 압력행사(11.9%) 의 순서로 나타났다. 실제로 이 모든 것들은 사회지도층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접근 가능한 수단을 악용한 것으로 기본적인 직업윤리와 사회윤리의 결여가 빚어내는 부정적인 산물들이다.

얼마 전 시민단체들은 부동산 투기의혹을 받고 있던 이헌재 전 재경부장관의 퇴진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그가 혹 청렴성에 약간 결함이 있을지라도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시민단체가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국민 대부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고위공직자 임명시 능력이나 경륜을 갖추었음에도, 후보 검증과정에서 재산형성이나 병역 등이 문제가 되어 낙마하는 사례"에 대해 응답자의 75.6%는 "사회지도층은 더욱 청렴해야 하므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대답했으며, "도덕적 잣대를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은 22.9%에 불과했다.

기본이 안된 사회지도층, "너나 잘 하세요"

사회지도층에 대한 불신의 기원은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간단한 곳에 있다. 국민들은 가장 기본적인 의무조차도 사회지도층이 실천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일반 국민들의 82.1%가 사회지도층이 병역이나 납세의 의무 등 국민의 기본 의무를 실천하지 않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국민들이 사회지도층에 요구하는 청렴성은 "우리 정도만 하면 된다"는 최소 사양의 것이다. 사회지도층이 청렴성과 관련하여 실천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로 일반인들은 33.8%가 "납세, 병역 등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 그리고 그 다음으로 소외계층에 대한 봉사를 꼽았다. 전문가들의 경우는 기본 의무이행이 35.5%로 일반인들에 비해 더 높았으며, 재산형성의 투명성 강화가 27% 2위, 부의 사회 환원이 23%, 소외계층에 대한 봉사는 12%에 그쳤다.

국민들은 기본적인 의무도 실천하지 않는 사회지도층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보장받고 명예를 누리는 지도층 인사들이 그에 합당한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어느 정도 실천해 왔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일반국민들의 83.7%가 실천하지 않았다고 응답하는 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일회성 연탄배달보다는 충실한 납세와 병역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사회지도층의 청렴성을 강화하는 방법은 엄격한 법집행, 사회지도층 자신의 솔선수범, 그리고 적절한 감시라는 3가지로 요약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모든 것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 김정수
사회지도층의 부패에 대해 적절한 처벌이 내려지고 있는가에 대해 88.4%의 국민들은 "죄질에 비해 관대한 처벌로 끝난다"고 응답하였다. 국민들의 절대다수는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러한 법치주의의 좌절이 결국 사회지도층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회지도층의 청렴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반국민들의 경우 39.9%가 자발적 의식개혁을, 38.6%가 법제도의 강화를 꼽았다. 전문가들의 경우는 33.5%가 법제도의 강화를 그리고 그 다음으로 32.5%가 솔선수범을 강조하였다.

국민들의 다수는 일반국민이 접근하기 어려운 사회지도층에 대하여 언론과 시민단체가 감시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론의 경우는 59%, 시민단체의 경우 67%의 응답자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다고 응답하였다. 그런데 언론의 경우 사회지도층의 부패를 "오히려 눈감아주고 있는 것 같다"는 응답도 22.8%나 되어 권언유착에 대한 의혹을 가지고 있는 국민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설문은 그 동안 사회지도층에 대한 국민들의 시각이 부정적 일 수 있다는 암묵적 합의를 실질적으로 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부정적 시각의 원인에 대해서도 상세히 밝혀냈다. 일반국민들이라면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납세와 병역 등 국민의 의무를 사회지도층이 피해가고 있는 현실에서 사회지도층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지나치다'고 단죄하는 것이야말로 지나친 반응임이 드러난 것이다.

엄정한 법의 집행, 사회지도층의 솔선수범, 적절한 감시라는 3박자가 결여된 상황에서 사회지도층의 높은 청렴도를 기대하기는 여전히 힘든 현실이다.

일본 식민통치, 분단, 토지개혁, 사상대립,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최근의 정보화 과정에서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는 "노블리스"들이 어느 정도나 될지 모르지만 매체들은 여전히 이들 불특정한 사회지도층의 "오블리주"를 힘겹게 노래하고 있다.

일벌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심히 일해 왔던 산업화 과정의 국민들, 용감하게 독재와 맞서 싸웠던 민주화 과정의 대중들, 소리 없이 낮은 곳에서 봉사를 하는 서민들, 수 십년 동안 벌어 모은 돈을 사회에 내놓는 떡장수, 김밥 장수 할머니들은 "노블리스"가 아니었지만 "오블리주"를 다했다. 언제쯤이나 한국사회는 노블리스를 자처하는 사회지도층들의 오블리주를 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제가 몸담고 있는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에서 설문조사 전문기구인 TNS에 의뢰하여 11월9일부터 15일까지 전국 일반국민 1500명과 전문가 200명을 상대로 사회지도층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기사는 주요 설문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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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간 반부패운동에 몸담아 왔다. 또한 10년간 가족들과 함께 홈스쿨과 대안교육활동을 했다. 편역/편저로는 반부패지도 I, II, III이 있으며, 저서로는 "다리미를 든 대통령-부패 없는 사회를 위하여"(민들레)가 있다. 현재 캐나다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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