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 드러 눕는 오름
제주의 도로를 달리다 보면 황금벌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드넓은 초지와 들판 사이사이 검게 그어놓은 돌담. 그 돌담 위에 걸터앉은 노란 감귤의 모습은 겨울의 여백을 채워준다. 그리고 들판에 드러누워 있는 높고 낮은 오름은 부드러운 선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기도 하고 어머님의 가슴처럼 푸근한 정감을 느끼게 해 주기도 한다.
제주시에서 12번 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가노라면 청정의 바다로 유명한 함덕 해수욕장이 있다. 제주를 방문한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번쯤 함덕 해수욕장 백사장을 걸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다 오른편에 드러 누워있는 서우봉 오름을 올라 본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나 역시 서우봉을 사진에 담아오기만 했지 그 봉우리를 오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늘 숙제처럼 미루어 왔으니까 말이다. 서우봉은 맨발로 백사장을 거닐며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을 뛰게 하는 오름이다.
생태계의 전시관
서우봉 가는 길에 가을이 열리고 있었다. 함덕 해수욕장에서 서쪽으로 통하는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고 '서모봉'이라고 새겨진 묘지 석 앞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좁은 농로 길 황토흙을 밟는 기분은 맨발로 여름바다 모래를 밟는 기분보다 더욱 알싸하다. 양쪽으로는 마늘밭과 풋나물들이 심심한 듯 고개를 내민다. 농로의 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지만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에 향긋함이 쏟아진다.
특히 농로 길 옆에는 갖가지 생태계가 살아 숨쉬고 있으며 가을 야생화가 듬뿍 피어 있어 마치 국화 전시장에 온 느낌이다. 야생 국향을 맡으며 오름을 오르는 기분은 중턱에 올라 갈 때까지 이어진다.
서우봉은 '서쪽에 있는 산'을 뜻하는 것으로 '서모봉', '서무봉'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서우봉은 그 형태가 물소가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것처럼 '물소 서'(犀)자를 써서 '서우봉(犀牛峰)'이라 불렀다고 한다. 제주의 오름은 전설과 유래가 있듯이 서우봉의 전설 역시 그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우애가 깊은 한 학자가 아우를 부르다가 시체가 되어 언덕에 올라왔다는 애절한 이야기와 '쇠발콥'라는 지명이야기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속의 현실로 '띠'를 이어온다. 그 때문인지 '쇠발꼽'에서는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이때 돼지 희생을 안고 바다 속에 들어가 놓고 나오면 반드시 빗방울이라도 내렸다고 한다.
서우봉 언덕배기는 계단식으로 오름 중턱에는 농부들의 삶이 베어 있다. 파랗게 돋아난 마늘과 푸성귀가 함덕 해수욕장을 바라보며 키 재기를 한다.
솔바람 내음에 익어가는 열매들이 나그네를 대접한다. 잘 익은 으름이 마치 바나나 같다. 옛날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과일역할을 했다는 으름을 따서 껍질을 벗겼더니 바나나처럼 담백한 맛이 있다.
오름 중턱에서 만나는 열매의 풍성함.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빨간 풍선처럼 빨간 가을 열매가 내 마음을 흥분시킨다. 소나무 숲에 숨어있는 보리수나무도 작고 탱글탱글한 열매를 앞세워 인사를 한다. 오름 나그네들의 입맛을 돋우는 열매를 하나 따서 입에 물었더니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냄새가 오름을 오르는 기분처럼 달콤하다.
숲에 엉켜 사는 생태계의 풍성함. 함덕 해수욕장의 모래 알갱이들만큼이나 수많은 생태계가 한데 어우러져 숲을 이룬다 그 숲을 뚫고 중턱에 오르자 지난 가을 비에 깊게 패인 토사가 유출되어 돌멩이들이 굴러다니는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오름 복원이 당장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해도 토사의 유출로 인해 원래의 모습이 훼손되어 간다는 사실은 아쉽다.
역사의 상처 그 언덕을 밟고
서우봉의 의미는 여기저기 역사의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제주의 오름은 대부분이 일본의 역사와 연계 해 있으며 4·3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서우봉은 그 상처가 더 깊다고 말할 수 있다. 초행길이라 봉우리 동쪽에 파놓은 일본군들의 격전지인 진지동굴을 가 보지 못함이 아쉬웠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아픔과 약자의 흔적을 안고 있는 서우봉 상처는 삼별초군의 대 격전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원당봉과 함께 통신의 봉우리로, 일본군의 진지동굴로 제주 사람들에게 아물지 않은 4·3의 아픈 기억속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봉우리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는 이 봉우리를 딛고 희열을 느낀다. 살아있는 자들은 역사의 뒤안길을 가슴에 묻고 죽은 자의 '언덕'을 밟는다. 서우봉 정상에 올라 동서남북을 둘러보며 땀을 닦으면 감탄사와 함께 죄스러움이 밀려온다. 왜일까.
서우봉 정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으면 멀리 북촌 마을이 바다와 연계하여 수를 놓는다. 인근 바다위에 오롯이 떠 있는 달여도가 또 하나의 신화를 낳는다. 그리고 뒤를 돌아다보면 한라산이 구름 속에 오락가락하며 조선시대 서신을 교환했다는 원당봉의 봉우리가 마치 손에 잡힐 듯이 해수욕장의 건너편에 떠 있다.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 169-1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서우봉은 이웃마을 북촌리와의 경계오름으로 표고 113.3m, 비고 106m, 둘레 3,493m로 두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원추형 화산체로 북쪽 봉우리는 송이로 된 분석구이며 남쪽 봉우리는 용암 바위가 정상에 노출되어 있다.
서우봉 두 개의 봉우리를 오르는 데는 1시간 정도, 봉우리의 크고 작은 묘들 앞에 서 있으려니 제주의 오름은 산자와 죽은 자의 요람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제주시-12번 도로(동쪽)- 조천- 함덕해수욕장- 서우봉. 40분 정도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