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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드림> 안현주
선문답(禪問答), 소이부답(笑而不答)의 행보를 계속해온 고건(사진) 전 총리가 안개를 걷어내고 있다.

오늘(23일) 오전 11시 서울 연세대학교 상경대 대강당에서 열린 이 대학 리더십센터(소장 양승함) 초청강연에서 고 전 총리는 '창조적 실용주의'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서울시장과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한데다 현 대권주자 중 선두인 그에 걸맞게 강연주제는 '창조적 실용주의 : 불확실성의 시대를 헤쳐가는 통합의 리더십'이었다.

지난 2004년 5월 총리직 사임후 국내에서 한 첫 강연이다. 고 전 총리는 이날 강연을 시작으로 대학생 등 젊은 층과의 만남에 주력할 계획이다.

고 전 총리는 이날 강연 전반부에서 지난해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기 직전인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6시간 동안 자신의 행적을 소개했다.

"탄핵안 6시간, 국가리더십 중요성 단적으로 보여준 것"

"지난해 3월 12일 탄핵안 가결됐을 때는 국가 위기상황이었다. 오전 11시쯤 TV를 보면서 가결된다는 직감이 들었을 때 앞이 깜깜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이 힝클리에게 총격을 당했을 때 부시 부통령은 비행기 타고 있었다.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이 자신이 대통령 업무를 맡겠다고 했으나, 대통령 유고 때 국무장관은 계승 순위가 한참 뒤였다. 이처럼 미국 같은 나라도 위기상황에서 허둥댔다.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법책을 꺼내들었다. 탄핵안이 가결되면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고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한다는 것뿐이고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엇이 제일 급하고 무엇이 제일 중요한가를 생각했다. 국가안보였다. 청와대와 사전에 조율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청와대와 상의한 뒤 국방부에 전군 지휘관 경계령을 내릴 것을 지시하는 등 조치를 취했다.

그 다음이 국제관계였다. 외무장관에게 각국 외교사절과 해외 각 공관에 '안보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리도록 했다. 6자회담국 중 북한을 제외하고 각국 외무장관에게 같은 내용에 대해 직접 알리라고 지시했다.

외국인투자가와 해외금융기관에도 같은 내용을 알리도록 지시했다. 도시락을 먹으면서 전화기를 손에서 떼지 않았다. '한미동맹에 아무런 문제없다'는 미국 국무부 성명이 나온 뒤 금융시장이 안정됐다.

헌법재판소장에게 탄핵심판까지 걸리는 기간을 가능한 줄여 달라고 요청했고, 이헌재 부총리를 불러 경제안정대책과 해외신인도 유지대책에 관련한 회의를 했다. 이어 오후 3시 30분에 임시국무회의를 소집해 탄핵기간 동안 해야 할 일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국회의장에게 국회의결서를 오후 5시 노 대통령이 지방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부터 의결서가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순간 대통령의 권한은 정지된다.

5시가 조금 안 돼 노무현 대통령이 참가한 가운데 국무위원 간담회가 있었다. 그 뒤 관저로 가는 노 대통령을 본 직후부터 권한대행 업무가 시작됐다.


이어 그는 "순전히 저의 본능과 판단에 따라 행동한 숨막히는 6시간이었다"며 "국가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를 단적으로,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게 리더십은 피할 수 없는 화두"

급박했던 탄핵안 정국에서 그가 어떤 리더십을 발휘했는지 과시하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또, "목민관도 해보고, 최고통치자를 보좌하기도 한 제게 리더십은 생활의 일부이자 주된 관찰 대상이었다"며 "제게는 리더십이라 조심스러운 화두이면서도 피할 수 없는 화두"라고 말했다.

고 전 총리는 현재의 우리사회를 '불확실성의 시대, 다중 위험사회'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서 이념갈등에 따른 사회양극화가 더욱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면서 "진보와 보수의 이념에 사로잡힌 정치 리더십은, 우리 사회가 처한 다중적 위험에 대처하는 데에 도움은커녕 해가 되는 시대착오적인 리더십"이라고 현 정치권 모두를 비판했다.

그동안 그가 보여온 조심스러운 언행에 비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발언들이다.

계속해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두고 벌이는 진보, 보수의 대결이 이념양극화의 수준에 이르렀다면 이는 진전이 아니라 정체"라며 "정치 리더십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이념의 미혹에서 벗어나 실사구시를 따르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창조적 실용주의가 기회의 문을 여는 열쇠"

고 전 총리는 현 시대가 원하는 과제를 "안전국가, 녹색사회, 첨단산업과 전통산업을 조화시키면서 세계와 경쟁하며 협동하는 강중국(强中國) 건설"이라고 규정한 뒤, "이념의 굴레를 벗어나,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이런 과제를 이뤄내려는 리더십을 '창조적 실용주의' 리더십으로 부르고 싶다"며 '창조적 실용주의'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압축성장을 거쳐 불확실성의 시대 속의 다중적 위험사회가 된 한국, 그러나 그 위험과 위기 속에 기회가 숨어 있다"며 "창조적 실용주의가 그 기회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굳게 믿고 있다"고 덧붙였다.

고 전 총리는 이날 강연에서 "창조적 실용주의의 정확한 이름을 여러분이 지어달라"며 "호프미팅도 좋다, 생각있는 분들은 제 싸이월드에 글을 남겨주면 된다"고 말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민주당·중부권신당과 관련 없다"

그는 또 "민주당, 중부권 신당 합류 얘기가 나오는데 확실한 색깔을 밝히는 것이냐"는 한 학생의 질문에 "정치적 색깔을 내세운 것은 아니고 지금의 정치지도자들이 그런 생각을 했으면 한다는 생각"이라며 "저는 정치인이 아니고 정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슨 당 무슨 당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해,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행보를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고 전 총리의 한 측근은 "젊은 세대들과의 교감과 대화가 부족했기 때문에 대학강연 등을 계속 할 생각"이라며 "고 전 총리도 젊은 세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한다"고 전했다.

이 측근은 또 "연말에 부산대 강연을 가게 될 것"이라면서 "노무현 정부의 첫 총리라는 점에서 (고 전 총리의) 발언이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오늘은 상당히 세게 얘기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날, 강연이 열린 504석 규모의 연세대 상경대학 각당헌에는 연대 학생과 일반시민 700여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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