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20대 초반의 한 여성이 두 번째 임신 중 병원측에서 실시한 HIV 항체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였다. 병원측은 가족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가족회의 결과 그 여성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해외로 입양 보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아기는 HIV 음성이었다. 이 여성이 바로 지난 2002년 여수 에이즈 사건으로 유명한 HIV 양성인 K씨이며 영화 <너는 내 운명>의 실제 주인공이다.
정신지체 3급 수준의 지능을 가진 장애 여성 K씨는 우리 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다. 부랑자인 첫 남편은 그에게 티켓 다방에 나가 성매매로 돈을 벌어올 것을 강요했고, 두 번째 남편과는 비교적 행복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진 빚 200만원을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던 중 인신매매를 당했기 때문이다.
여수의 집창촌에 갇혀 돈이라고는 한푼도 만져보지 못한 채 매일 낮밤 남성을 받아야 했던 K씨. 마침내 여수를 탈출하여 다방을 하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불안한 생활을 영위하던 중 또 다시 인신매매범을 만나 K씨는 최대의 고비를 맞게 되었다. 그 인신매매범이 K씨를 인천의 집창촌으로 팔아넘기는 데 실패하자, 보건소에 고발했던 것이다.
보건소 공무원들의 행동은 인신매매범보다 더 잔혹했다. 이들은 K씨를 구타하고 팔을 비틀어 수갑까지 채워 경찰서로 데려갔다. 경찰들은 K씨를 '긴급체포'했다. 이때 생긴 상처가 K씨의 손목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공무원들이 억지로 수갑을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사법권이 없는 공무원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그러고선 언론사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섹스에 미친 여자!"
"에이즈 복수녀!"
나아가 여수시장은 K씨의 사진을 시내 광장에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잡지사 기자가 K씨의 남편을 취재하곤 K씨와 남편이 사는 마을 주소와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 당시 한 일간지에서는 이렇게 규정했다.
"마녀사냥이다."
여수 에이즈 사건의 진실 - 마녀사냥
지난 10월 22일 한국 에이즈 재평가를 위한 인권모임 이하, 인권모임 인터넷 사이트에 'kcs53'이란 아이디를 사용하는 HIV 양성인이 하소연을 올렸다.
"이들은 전부 도둑놈들입니다. 의사가 아니에요. 전부 장사꾼이고, 사기꾼들입니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이렇다. 담석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들이 사전 허락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HIV 항체 검사를 해버렸고, 이 과정에서 양성 반응이 일어나자 수술은커녕 AZT 등 에이즈 약을 복용시켰고, 환자의 가족에게 "에이즈에 걸렸다"라고 말해 버린 것.
이 또한 당사자의 허락을 받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의 이 같은 의료행위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사생활 보호 침해와 관련된 것으로 의료면허증을 박탈당할 수 있는 대단히 심각한 범죄다.
문제는 이러한 인권침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HIV 양성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데 있다. 병원에서는 일방적으로 HIV 검사를 실시하며, 단 한 차례 양성 반응이 일어나도 이른바 에이즈 환자로 단정한다.
K씨를 "불태워 죽여야 한다"는 무서운 글귀들이 인터넷에 나돌 때 '여수 에이즈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하던 인권모임을 제외하곤 다른 에이즈 단체 및 사회단체는 철저하게 침묵했다. 아니, 완전히 침묵하진 않았다. '한국에 에이즈 광풍이 몰아친다'면서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을 퍼뜨리는 단체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K씨는 더욱 심하게 고립되었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해야 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여수에서 HIV 양성 반응을 보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K씨 외에도 "저 집에 에이즈 환자가 살아요"라고 이웃에게 알린 보건소 공무원 때문에 고향을 등져야 했던 HIV 양성인들은 잊혀진 존재로 남아 있다.
HIV양성인의 1/3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던 사람들의 운명은 이러했다. 링거 주사 줄을 찬 채 병원을 빠져나와 차가운 호수에 몸을 던지고, 두꺼운 침대 시트로 목을 매고, 청산가리를 먹고, 시속 200km에 육박하는 속도로 차를 몰아 바다로 뛰어들고… 이것이 운명의 실체였고 사회는 이를 방관하고 조장했다. 심지어 가족까지 이들의 운명을 외면했다. HIV 양성인의 1/3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한국을 방문해 에이즈 편견을 경험해본 한 외국인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은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들이 에이즈를 퍼뜨린다고 간주하는 것 같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반강제적인 HIV 항체 검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양성 반응이 일어나면 강제 출국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하버드 의대에서 조사한 결과 HIV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인 혈청의 90%가 위양성 가짜 양성인 것으로 드러났으며, 영국은 확정검사인 웨스튼 블랏 검사를 폐기했다. 양성 반응의 50%이상 위양성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HIV 검사는 최악의 검사가 되고 있다.
많은 환자들이 에이즈가 아닌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있는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언론은 해외 에이즈 최신 정보를 국민은 물론 당사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다. 지금 그들의 운명을 죽음에서 삶으로 돌리는 최선의 방법은 진실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