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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령샘
ⓒ 정성필
눈을 뜨자 차가운 빗방울이 텐트를 친다. 툭툭, 많이 내리는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비가 내리면 텐트 무게가 두 배가 된다. 배낭이 무거워진다. 몸도 무겁다. 밖에서 해먹을 밥도 텐트 안에서 해야 한다. 비좁은 텐트 안에서 모든 일을 하려니 구질구질하다.

하는 수 없다. 선택한 일은 기쁨으로 해야 한다. 백두대간은 내가 선택한 길이다. 선택했으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한다. 아침이 늦었다. 간밤 늦게 잔 탓도 있지만 비 내리는 날 높은 습도에 몸이 무겁다.

아침을 11시 정도에 먹고 이화령으로 간다. 비가 내리는 날 산행은 습기와의 싸움이다. 배낭 덮개가 없는 나는 배낭을 판초 우의로 덮는다. 배낭이 젖으면 무게가 무거워진다. 황학산과 갈미봉 가는 길은 고속도로처럼 길이 분명하고 좋다. 몸이 땀에 젖는다. 비 내리면 비에 젖는 게 아니라 땀에 젖는다.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젖는 건 마찬가지다.

저체온증은 사람의 몸이 젖었을 경우에 발생할 확률이 가장 높다. 저체온증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빗물은 막아주고 내부의 습기는 밖으로 배출하는 고어텍스제품의 옷을 입어야하는데 나는 백두대간을 시작할 때 장비에 대해서도 무지했을 뿐더러 고어텍스처럼 비싼 옷을 구입할 정도로 돈이 충분하지 않았다.

다만 몸에 차오르는 습기를 빨리 배출하려고 판초 우의를 최대한 몸에 달라붙지 않게 했다. 이화령에 도착하니 휴게소가 있었다. 비를 피하고 잠시 몸을 따스하게 하려고 이화령 휴게소에 들어갔다. 휴게소에는 산장이라는 팻말도 함께 있어 산장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단다.

비도 맞고 습기가 온몸을 시리게 만들어 산장에서 자고 싶은 생각도 들어 하루 자는데 얼마냐 물으니 위아래로 나를 훑어본다. 그리고 얼마인지 대답하는 대신에 비싸니 그냥 가라 한다. 아마도 내 몰골이 거지 몰골처럼 보였나보다.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니 주인 왈 " 이 산장은 산악인이 묵는 곳이 아니라 연인이 이용하는 곳이라 그래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렇게 백두대간에 종주자가 쉴 만한 산장이 없다는 게 아쉽기만 하다. 휴게소에서 쵸코파이 한 상자 사가지고 간다.

이화령에서 조령산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군인들이 이화령비 앞에 트럭을 대 놓고 부식을 운반한다. 부식 박스에는 전투식량과 건빵이 가득 담겨있다. 전투식량과 건빵을 보니 침이 꼴깍 꼴깍 넘어간다. 군대 시절엔 지겹게 먹고 맛없다 불평했던 것들이 왜 갑자기 그렇게 맛나 보이는 걸까?

군인들에게 부탁해서 기념사진을 찍고 조령산으로 향한다. 군인들이 뒤에서 성공하시라고 "파이팅" 해준다. 고맙긴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저 전투식량인데… 왠지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 막영지에서 본 구름 사이의 태양
ⓒ 정성필
백두대간을 시작하고 변한 게 있다면 식욕이다. 먹어도 허기지고 배고프다. 평소엔 전혀 먹지 않던 사탕과 초콜릿도 없어서 못 먹는다. 있으면 먹고, 먹어도 허기진다. 무슨 병에 걸린 거나 아닌지 걱정될 만큼 먹어댄다. 전투식량이 내 것이 아닌데도 걷는 길 내내 눈앞에 건빵이며 전투식량이 어른거린다. 먹고 싶다 생각하니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난다. 이런 젠장. 나는 거지인가 보다.

오솔길 같은 길을 걷다보니 우측으로 이화령 고개의 꼬불꼬불한 길이 있고 민가도 보인다. 좌측으로는 돌무더기가 빗물에 곧 흘러내릴 듯 위태하게 쌓여있다. 비는 잦아들긴 했어도 몸은 끈적거린다. 한 시간을 넘게 걸으니 조령샘이 나온다.

물이 있어 사방을 둘러보니 누군가 텐트를 쳤던 흔적이 있다. 물도 있고 비도 내리고 해서 이곳에 텐트를 치려 마음을 먹다 주변을 살핀다. 샘터 근처를 살피는데 분위기가 음습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 주변은 쓰레기로 가득하다. 샘에서 물만 보충하고 다시 출발한다.

삼 십 여분 오르다 보니 헬기장이 나온다. 더 이상 걷기가 싫다. 대간 시작할 때부터 아프기 시작했던 엄지발가락은 이미 감각을 잃었다. 아니 몇 개의 발가락과 양쪽 엄지발가락 모두 감각이 없다. 이젠 감각이 없는 발가락 세는 것보다는 날 잡아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앞선다.

오늘 비를 핑계 삼아 쉬기로 한다. 해가 지려면 네 시간도 훨씬 더 남았는데, 조령산 정상 밑 헬기장에 텐트를 친다. 밥을 평소보다 더 많이 한다. 해가 지기 전까지 해놓은 밥을 먹는다. 밖에는 비가 텐트를 두드리고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통 즉 코펠을 끌어안고 내내 앉아서 먹는다. 반찬은 없어도 행복하다.

▲ 산허리에 걸린 구름
ⓒ 정성필
아침이다. 비가 그쳤나 보다. 사방이 조용하다. 텐트를 열고 밖을 살피는데 사방이 온통 구름이다. 비가 잠시 그쳤나 보다. 멀리 산허리에 구름이 걸려있고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오려는 듯 안간힘을 쓴다. 카메라를 들고 나온다. 잠시 나온 햇살이 비와 추위로 얼어붙은 내 몸을 부드럽게 비빈다.

구름과 산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풍경을 담는다. 사진을 찍다 보니 다시 비가 내린다. 밥을 먹고 잔다. 시간은 이미 아홉시를 넘기고 있다. 전날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얼굴도 부었다. 늦잠을 잤다. 비가 내리자 비를 핑계 삼아 다시 잠을 청한다. 꼼짝도 하기 싫다. 병이 난 건 아닌데, 움직이기가 싫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웅얼거린다.

'비야 계속 내려라. 좀 더 쉴 수 있게 내려라.'

다시 일어나 밥을 또 먹고 어제 샀던 초코파이 한 상자 중 반을 먹어치운 후 다시 자면서 중얼거린다. 아마 나는 잠자는 병, 먹는 병에 걸렸을 거야.

태양이 떠야 비에 젖은 텐트며 눅눅해진 침낭이며 옷이며 배낭을 말릴 수 있다. 태양이 뜰 때까지 잠을 자기로 한다. 까짓 거 혼자 가는 길인데,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쫒아 오는 사람도 없는데, 오늘 하루 늘어지게 잔들 어쩌랴. 내친김에 또 잔다. 자다 깨다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 잠을 잘수록 일어나기가 힘들고 귀찮다. 자면서도 걱정 된다. 이거 혹시 병 아닌지 말이다.

11시 쯤 되었을 때 밖에서 사람소리가 난다. 텐트 밖으로 나가 보니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여성 등산객 4명이 서 있다. 아마도 산중에 텐트가 있으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구미에서 왔단다. 친구들끼리 종종 산을 다닌다 했다. 인사를 나누고 백두대간 중이라 했다.

▲ 산에서 만난 여인들
ⓒ 정성필
하지만 여성분들은 백두대간이 무언지 잘 모른다 했다. 다만 텐트 안이 궁금하다고 구경시켜 달란다. 도대체 텐트 안에 무엇 있는지 보고 싶단다. 나는 남자 혼자 사는 집인데…라며 나의 호텔을 열어 보여 준다. 호텔 안에는 침낭과 코펠 옷가지며 배낭이 뒤엉켜 엉망이다.

이크, 실수 했다. 나에겐 호텔이지만 숙녀분들에겐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게다가 땀 냄새에 발 냄새, 음식냄새도 뒤엉켜 고약했을 텐데 텐트를 잘못 보여주었나? 후회하지만 이미 속을 다 드러내 보였으니 할 수 없다. 산에서 처음 만난 여성이라며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주겠다 하니 세 분이 선다. 한 분은 사진이 체질이 아니란다.

어디까지 갈 거냐 물으니, 가는 데까지 가겠단다. 특별히 정한 목적지는 없고 그냥 쉬엄쉬엄 산행하러 왔다는 것이다. 잘가라는 인사를 하고 나도 서둘러 텐트를 걷었다. 어느새 햇빛이 부끄러운 듯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다. 출발하니 12시 정도가 된다. 아침을 두 번 먹어서인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 조령산에서 본 풍경
ⓒ 정성필
조령산 정상에서 조금 전 만났던 여성 산행인들을 또 만난다. 잠깐의 인연도 인연이라고 나는 반가워 내가 가진 소중하고 귀중한 초코파이를 먹으라고 주었다. 그들은 고맙다고 커피를 마시라고 따라준다. 뜨거운 커피에 비스킷까지 주어 점심을 대신한다. 헤어지는 길에 오렌지 하나와 방울토마토 6개를 준다. 오렌지와 토마토는 비닐에 잘 싸서 배낭에 넣고 출발한다. 조령삼관문까지 가야하는데 가는 길 내내 비가 오락가락 한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5월17일 부터 7월 4일까지 백두대간 무지원 단독 연속 종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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