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의 풍광을 모두 껴안은 오름
바삭바삭 '송이'를 밟는 감촉이 살갑다. 수만 년 전 화산의 흔적을 밟고 지나가기 때문에 그 느낌이 특별하다. 이 붉은 송이(scoria, 岩滓)는 화산활동 때 잘게 부서진 화산쇄설물이다. 정상까지 온통 검붉은 핏줄로 이어져 있다. 더 이상 드러낼 상처도 없는 듯하다. 벌거숭이 세상이 이런 모습일까.
능선을 올라가다가 만난 바람의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아찔하다. 오름을 찾은 사람이라면 자주 경험했던 바람이다. 봉우리의 바람은 더 사납다. 꼿꼿이 서서 앞만 보고 달렸던 지난 날을 더듬으며 몸을 낮추었다. 마찬가지로 생명력이 질긴 부처손이 적갈색 송이 바위에 바짝 엎드려 겨우살이를 준비하고 있다.
송악산 꼭대기가 아슬아슬하다. 세상 밖으로 홀연히 뛰쳐 나온 느낌이다. 옥빛 바다가 눈 시리다. 한라산보다 먼저 속살을 드러낸 산방산이 발 앞에서 신비를 품었다. 용머리 해안이 세상 속에 웅크리고 있다. 바다 가운데 떠 있는 형제섬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
그 옛날 오욕의 들판인 알뜨르비행장터에서 밭일을 하는 농부들이 보인다. 드넓은 상모리 들녘에는 지금 겨울감자들이 세상의 슬픔을 묻고 있다. 여전히 북쪽 모슬봉에는 군사시설인 레이더 전파탐지기가 세상을 감시하며 돌아가고 있다. 박쥐를 닮은 단산은 참으로 예술적이다. 국토의 시작을 알리는 마라도와 가파도가 오롯하기만 하다.
이중분화구를 탄생시킨 화산박물관
송악산은 제주도의 형성사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기생화산체로 알려져 있다. 단성복식화산(單性複式火山)이면서 이중분화구로서 세계지질학계가 주목하는 화산자원이다. 고산의 당오름, 성산의 두산봉, 우도의 쇠머리오름과 같이 '알오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중식화산체다.
제1분화구는 거대한 응회환 분화구다. 그 직경이 약 500m, 둘레가 약 1.6Km나 된다. 해안선을 이루고 있는 남쪽은 파도에 의한 침식의 속도가 빠른 반면 웅장한 해안절벽을 빚고 있다. 응회환 분화구가 품고 있는 알오름(제2분화구)은 둘레가 약 400m, 깊이가 69m로 경사가 매우 심하다. 화산분화 활동의 흔적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신비스러운 것은 결국 자연이다.
송악산 발아래는 깎아지른 해안절벽이다. 한없이 펼쳐진 해안선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다. 남태평양을 가로질러 온 겨울파도가 끊임없이 절벽에 부딪친다. 그 소리가 우렁차다. 마을 사람들은 이 오름을 '절울이오름'이라고 불렀다. 파도가 거품을 물고 해안 절벽에 부딪치며 일궈내는 울음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화산섬의 흔적을 더듬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오랜 세월에 걸쳐 파도와 바람이 빚어낸 신의 조각품을 감상하고 있다. 화산쇄설성 퇴적층과 용암으로 만들어진 해안단애가 절경이다. 숨이 멎을 것 같다. 바다가 짙푸르다. 파도가 지난 자리에는 투명한 옥빛만 남았다.
태평양전쟁의 상흔, 해안절벽 진지동굴
분화구를 벗어나 발길을 산이수동 해안가로 돌렸다. 여기에도 단성복식 화산활동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닷물과 마그마가 만나 수성분화를 거치는 동안 퇴적층이 쌓인 곳이다. 일제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에는 송악산 응회환 퇴적층이 장구한 세월을 말해 주고 있다.
해안절벽은 예리한 조각칼로 다듬은 듯하다. 침식작용은 현재진행형이다. 송악산 화산쇄설암(응회암)의 낙반도 계속되고 있다. 검은 모래에 뒹굴고 있는 화산덩어리가 가슴 뭉쿨할 정도다. 저 마다 모양이 다르나 그 솜씨가 걸작이다. 인간이 빚었다면 이와 견줄 수 있었을까.
송악산 산이수동 해안은 화산섬의 비밀 말고도 또 하나의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군 자살특공대인 카미카제(神風)가 사용할 자폭용 어뢰정(카이뗑)을 숨기기 위해 파놓은 인공동굴이 그것이다. 당시 우리 땅에 주둔했던 일본군 중 절반에 해당하는 7만5천여명이 제주섬에서 연합군과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른바 '결(決)7호작전'이다. 절벽 아래에는 15개의 동굴이 숭숭 뚫려 있다. 이 중 2개는 파도가 빚은 해식동굴이다.
진지동굴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주의가 남겨놓은 쓰라린 상처다. 동굴 안에서 보이는 해안경관이 섬뜻하다. 한 시대의 아픔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이른 것 같다. 놀랍고 슬프고 충격스러운 상흔이다. 60년 전 곡괭이와 삽자루 하나로 강제노역에 내몰린 제주 섬사람들의 피울음이 파도소리에 실려 있는 듯하다.
송악산은 유명관광지다. 그에 못지 않는 서글픔도 있다. 이곳에는 세계가 주목하는 화산자원에 대한 설명도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자연을 난도질한 일본군 진지동굴에 대해서도 안내문 하나 없다. 그 대신 TV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지를 알리는 대형 안내표지판이 뼈아픈 역사의 현장을 막아서고 있을 뿐이다.
억울하고 원통한 섯알오름 탄약고 학살터
송악산 북쪽의 상모리 들녘으로 향했다. 점령군이 떠난 자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상흔을 보기 위해서다. 이곳에는 1926년 일제가 중국대륙 침략을 위한 일본 해군항공대 전진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건설된 알뜨르비행장의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다. 비행장 건설공사에는 하루 5000여명에 이르는 섬사람들이 강제 동원되어 생지옥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날의 아우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유지로 남은 감자밭에는 겨울수확을 앞둔 농부들의 꿈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단산과 모슬봉, 산방산을 배경으로 잔뜩 웅크린 격납고도 옛 모습 그대로다. 모두 20여 곳. 이 반원형의 콘크리트 격납고는 도대체 왜 만들어졌을까. '카미카제'가 사용할 자폭용 전투기를 대기시키는 곳이었다. 소름끼친다.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던 일제가 패망하지 않았다면 이곳은 그야말로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다. 어디 여기 뿐이겠는가. 화산섬 제주가 온통 쑥대밭이 됐을 것이다.
송악산 서쪽에는 제주 최대 탄약고 터가 있다. 일제 항복 뒤 미군이 폭파해 버린 탄약고 자리다. 이곳이 불행한 역사를 상징하는 섯알오름 학살터다.
'백조일손유족회'와 '예비검속에 의한 피학살자 한림지역 유족회'가 세워 놓은 안내문에 따르면,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치안국의 불법적인 예비검속(Preventive Detention) 광풍이 몰아쳐 무고한 제주도민 약 1천여명이 경찰에 붙잡혀 대량 학살됐고, 이 중 252명이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섯알오름 탄약고 학살터에서 총살되어 암매장된 곳이라 전하고 있다. 비명에 간 양민들은 제주 4·3항쟁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4·3이 다 끝나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시 억울하고 원통한 역사의 제물로 바쳐졌다.
그 후 이곳은 당시 계엄군경에 의해 7년 동안이나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으로 봉쇄됐다. 유가족들의 끈질긴 탄원으로 당국의 시신수습허가를 받은 것은 1956년 5월 18일. 섯알오름 탄약고에서 죽어간 양민 중 유가족이 수습한 149구의 시신 가운데 132구의 시신을 모셔 놓은 곳이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다. 조상이 다른 132명이 한날 한시 한 곳에 죽어 그 자손도 하나가 된 영혼이 잠드는 묘지다.
섯알오름 학살터에는 잡초들만이 무성하다. 어두웠던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있는 송악산 섯알오름과 알뜨르비행장터에도 겨울 해그림자가 걸리기 시작했다. 공군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창공을 휘젓고 있다. 일제와 4·3,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얼룩진 근대사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적막한 들녘을 뒤흔들고 있다.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생명체, 송악산
제주 화산활동의 흔적을 안고 있는 송악산은 살아있는 자연박물관이다. 토기와 패총이 발견된 선사문화유적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송악산 오름과 들녘, 해안절경은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생명체다.
아직도 송악산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생채기를 앓고 있는 듯하다. 송악산을 파헤치는 관광개발과 상투적인 자연보전은 있을 수 없다. 송악산이 자연과 역사, 문화를 모두 품고 있다면 더욱 튼실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는 지혜가 먼저다. 천혜의 자연이 속살거리는 사연 많은 대정고을에 찬바람이 세차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제주시->서부관광도로(95번 국도)->덕수마을->산방산->사계마을->해안도로->산이수동 포구(송악산)
<주변명소>
산방굴사, 용머리해안, 단산, 마라도, 가파도, 형제섬, 제주조각공원, 추사적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