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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주 장편소설 <시간의 다리>
ⓒ 창해
나는 청계천과 아주 가깝게 살아온 사람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던가 창신동 고모 집에 놀러갔다가 길을 잃을 뻔한 것도 청계천이요, 중학교 2학년인 1974년부터 전업작가 생활을 하던 1996년까지 23년 동안 신설동 사거리 부근에 살았으니 육안으로도 늘 관찰되던 곳이 청계천 8가였다.

심지어 청계천 7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는 아예 첫 출판사 생활을 시작했으니 그때는 낮 시간의 거의를 그곳애서 보냈고, 소주도 거의 청계천에서 마신 셈이다. 헌책을 살 때도 청계천을 찾았고, 농구공을 살 때도 청계천을 찾았으며, 육군에서 병장 전역한 뒤 대학로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여성 B와 이야기 하며 밤을 보낸 것도 청계천이다.

마침 청계천의 고가도로를 해체하고 복개를 걷어내며 깨끗한 물길을 내는 시기에 맞추어 소설선이 나와 관심이 갔다. 내가 읽은 고은주의 <시간의 다리>는 창해에서 기획한 '맑은내 소설선' 11권 가운데 한 권이다.

다른 10권은 김별아의 <영영 이별 영이별>, 서하진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김용범의 <달콤한 죽음>, 이승우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이수광의 <두물다리>, 박상우의 <칼>, 전성태의 <여자 이발사>, 김용운의 <청계천 민들레>, 김용우의 <모전교에는 물총새가 산다>, 이순원의 <유리의 노래>.

'청계천'을 상징으로 하거나 배경으로 삼거나 모티브로 한 기획 의도가 담겨 있겠지만, 되도록 기획소설이라는 선입견을 멀리 해가며 소설을 읽었다. 평범한 은행원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름(이성계)을 가진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휴대폰 판촉 행사를 하는 내레이터 모델 강자영을 만난다. 그녀는 '나'를 '조선 태조 이성계'라고 하며 옛 기억을 되살려 주려고 한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그 핵심은 이렇다.

광교의 다리받침으로 쓰인 신장석은 원래 신덕왕후 무덤의 병풍석이었다. 화엄신장을 둘러싼 신비한 구름무늬와 그 아래 단아한 덩굴무늬를 아로새긴 열두 개의 돌은 태조 이성계가 계비에 대한 사랑을 담아 당대 최고의 석공을 동원해 만든 묘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그 돌들을 뽑아 다리로 만들어 뭇사람의 발에 짓밟히게 했다. 이후 청계천이 콘크리트 도로로 덮이자 신장석은 암흑 속의 하수구에 잠겨버렸다.
- <시간의 다리>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거의 대부분은 '강자영'이 신덕왕후의 혼령이 되어 '나'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이다. 그 역사적 탐구가 돋보인다. 서울에서 태조의 냄새가 나는 곳과 신덕왕후의 냄새가 나는 곳은 모두 답사한 뒤에 소설을 쓰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 현학적인 맛이 오히려 독자의 호흡을 불편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소설의 흐름에 별다른 기복도 없다. 문장의 모양만 다르지 반복되는 듯한 내용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그다지 길지 않은 경장편 소설인데도 읽어 나가는데 상당히 힘들었다. 현실은 보이지 않고 조선시대의 과거 사정만 대사로 풀어가며 집요하게 반복 시킨 느낌이었다.

차라리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만 지면을 쓸 게 아니라 액자로 그 시절의 사람 이야기를 그려내는 구성법을 택했거나, 현실에서의 은행원과 내레이터 모델의 일상과 기복 있는 만남이 틈틈이 그려졌으면 읽는 지루함이 덜하지 않았을까.

복개된 청계천을 주무대로 살아온 사람들이나 오가는 사람들이 더러 등장인물로 나오지 않는 것도 지루함을 더하게 한다. 게다가 여자 주인물(主人物)의 설명으로만 전개를 펼쳐 가다 보니 청계천이 복개된 채 가쁜 숨을 쉬는 이야기는 가깝게 다가오지 않는다. 신장석의 아픔도 뼈저리게 다가와 주지 않는다.

작가의 상당한 역사 탐구에도 불구하고 역사 선생님의 가르침처럼 일관하고 있어 아쉬운 노릇이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단편으로 썼다면 구성이 탄탄하였을 이야기를 경장편으로 늘여 쓴 소설을 읽은 느낌이었다.

시간의 다리

고은주 지음, 창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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