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겨울이 오면 가장 반가운 손님이 있는데 다름아닌 서리다. 낙엽이 지기 시작하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에 이젠 겨울이 오는구나하는 순간 서리도 함께 내린다.
서리는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사라고 하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서리는 기온이 어는 점 아래로 떨어져 대기 중의 수증기가 지면이나 주변 물체에 부착된 얼음결정을 일컫는다. 요즘 밤 늦게 퇴근하면서 내일 서리가 내릴 것인지 그렇지 않을지 짐작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 중의 하나이다.
서리는 날씨가 맑고 바람이 약하며 기온이 낮은 날 생긴다. 그러니 서리가 내릴지 예상하기란 쉽다. 아침에 서리를 볼 수 있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서리를 아주 어릴 적부터 보아왔다. 시골에 이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밭작물들은 제 명을 다한 셈이다. 고추가 그렇고 호박이 그렇다. 무서리가 내린 아침이 지나면 아직 수확하지 못한 밭작물들은 시골 할머니의 표현처럼 '팍 삶긴' 듯하다.
뜨거운 물에 호박 이파리를 담갔다가 꺼내면 히죽히죽 힘이 없는 것처럼 숨이 죽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것으로 겨울이 온 것을 직접 느낄 수 있다. 고추 역시 마찬가지다. 예상을 잘못해서 이 시기를 넘기면 농작물에 제법 많은 피해가 간다.
어린 시절 서리는 그래서 내겐 귀찮은 존재 중 하나였다. 한창 뛰어놀고 싶을 때 밭에서 일을 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추억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서리 때문에 정말 예쁜 추억을 만든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눈을 뜨는 동시에 아파트 아래 강둑에 서리가 많이 내렸는지 그렇지 않은지 내려다 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새하얗게 서리라도 내린 날이면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워서는 집에서 가까운 진양호로 나간다.
해가 떠오르는 무렵 햇살을 받아서 반짝이는 서리를 보면 자연의 힘을 느낄 수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이런 자연의 경이로운 변화가 없다면 사는 것이 무미건조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에게 사계절의 변화가 없는 곳에서 살라 한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계절의 변화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살아가는 것은 단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자연을 느껴야 한다.
몇 년 전 틈만 나면 친구들과 이른 아침에 서리 사진 찍으러 간다고 손을 호호 불며 무던히도 나돌아 다녔던 적이 있다. 서리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길에 호호 시린 손을 불며 따뜻한 오뎅국물 한 모금 마시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서리에는 '88야(夜)의 이별서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입춘(立春)으로부터 88일째, 즉 5월 2~3일에 내리는 서리를 말한다. 대개 이것으로 서리는 마지막이 된다는 뜻인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늦은 것도 가끔 있으며, 이로 인한 피해는 상당히 크다. 늦서리의 피해는 고랭지(高冷地)나 분지에서 특히 심하다.
어린 시절 이런 피해가 우리 집에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씨를 다시 뿌려야 했다. 서리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아름답기로 상고대만한 것이 있을까?
상고대는 나무서리(樹霜), 수빙(樹氷), 조빙(粗氷), 무빙(霧氷)이라고도 한다. 한자를 자세히 보면 이 단어들에 상고대의 모든 뜻이 포함되어 있다. 상고대는 지표면에서 높은 곳에 생긴다. 고산지방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발생하는데 가까운 지리산 정상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산을 쉽게 오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덕유산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 상고대이다.
지난 2003년 겨울 지리산 천왕봉에 오를 때 상고대를 봤다. 몇 해 전 러시아에 머물던 시절에는 상고대를 보기가 쉬웠다. 안개가 낀 겨울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것이 상고대였다.
상고대를 러시아에서는 '이니(Iney)'라고 부르는데 원래 뜻은 서리이다. 천왕봉 아래 장터목대피소에 머물 때 엄청난 바람이 불고 안개가 아주 짙게 긴 적이 있었는데 그 날은 그 안개가 순식간에 나무에 고착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정말 대단했다.
혹자들은 이 상고대를 눈꽃이라고 하는데 눈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눈이 오면 위에만 쌓이지만 상고대는 모든 부분에 다 생길 수 있다.
내가 본 상고대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러시아에서였다. 러시아의 겨울이 우리나라보다 생각처럼 훨씬 춥지는 않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처럼 습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체감 온도는 그렇게 낮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기온이 낮은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의 추운 날씨 탓에 상고대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워낙 기온이 낮아 대낮에도 자작나무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는 그림은 지금 생각해도 잊혀지지 않는다. 자작나무에 핀 상고대를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사람들은 다들 겨울이 오면 언제 첫눈이 올까를 기다리는데 나 역시 첫눈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첫서리가 더 기다려진다. 첫서리가 내리는 날은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아~ 이제 겨울이 시작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올해 첫 서리가 내린 지도 꽤 되었는데 올해는 고작 한 번 서리 사진을 찍었을 뿐이다. 아직 서리가 제 기력을 다할 날이 많이 남았으니 조만간 다시 한 번 서리를 찍으러 갈까보다.
덧붙이는 글 | * 서리를 찍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서리를 찍으려면 일단 부지런해야하며 소형 디지털 사진기만 있어도 충분히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겨울아침에는 기온이 낮아서 배터리 소모가 많아지므로 여분의 배터리를 준비하고 옷을 따뜻하게 입고 가는 것은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