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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다 익혀버릴 듯한 따가운 햇볕은 내 등을 강타했고 열이 오른 흙 밭은 내 얼굴에서 땀을 있는 대로 뽑아냈다.
우리 밭이 이렇게 넓은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아~~ 부모님은 왜 이렇게 밭고랑을 촘촘히 내 놓으신 건지. 자신이 세 고랑을 치고 나갈 때 한 고랑도 하지 못하며 빌빌대는 딸을 보며 엄마는 "눈이 게으른 뱁이다… 매고 나믄 금센디… 눈이 자꾸만 미련한 맘을 묵게 허는 것이다!"라고 하신다. 그러나 나는 눈만 게으른 것이 아니었다. 한나절을 뒷다리가 달달 떨리도록 고랑을 밭을 맸는데도 매야 할 밭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밭을 눈으로 쭉 훑고 나자 그 자리에 탁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땀으로 목욕을 하면서도 안 덥다고 하는 엄마의 그 늙은 오기가 밉기도 했다. 그런데 딸의 이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니가 와서 말동무라도 해준께 안 지겹도 좋다. 이리 농사지어서 딸도 주고, 아들도 주고… 올해는 니를 젤로 많이 줘야겄다." 그 한마디에 '내년부터는 절대 농사짓지 마세요! 돈도 안 되는 걸!"하려던 그 입이 합죽이가 되고 말았다.
혼자서 이 넓은 밭을 매는 일이 얼마나 지겨우셨을까? 돈도 안 되는 농사인 줄 알면서도 매년 그저 농사지어 자식 주는 재미로 힘든 줄도 모르고 씨 뿌리고, 밭을 매는 엄마의 그 맘이 이해되는 듯했다.
그때 잿빛구름이 하늘을 덮기 시작했다. 휴~ 엄마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 오기 전에 얼렁 애기들 델꼬 내리가라… 나는 이놈만 매불고 갈랑께!" 이럴 때는 "아니에요. 같이 내려가세요!"라고 해야 되는 것이 자식의 도리건만 철없는 이 딸은 기다렸다는 듯이 봄바람 난 처녀마냥 호밋자루를 밭고랑에 내던지고 내 아이들만 데리고 집으로 후다닥 내려와 버렸다.
집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비는 내렸고, 늙은 엄마가 비에 쫓겨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날 밤 고향집에서는 눈뜨고 보기 민망한 장면이 연출이 되었다. 그건 두어고랑 맨 밭에 다리가 풀려 누워서 찜질을 하는 젊은 딸년과 오전 내 물 한모금도 못 마시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밭을 맨 늙은 엄마가 비에 젖은 머릿수건도 못 벗은 채 딸과 손주들에게 줄 고구마죽을 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식으로서 "엄마 쉬세요! 제가 할게요!"라고 해야 한다는 것쯤은 배워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몸은 조금 더 늘어지지 못해 안달이 나서는 자식으로써의 마지막 양심의 소리조차 틀어막아버렸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뒤 고구마밭을 보듬어 안은 엄마의 모습과 그 엄마를 이제껏 미련하게만 생각해온 나의 모습을 수식어 하나 없이 은유법 하나 없이 적어서 농촌체험기에 응모했다. 글을 쓰는 내내 금세라도 밭고랑에서 흘리던 땀이 이마를 타고, 눈썹을 지나 흘러내릴 것 같아 몇 번이나 맥없는 이마를 쓸어내리기도 했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쓴 글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나도 농군의 자식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 부모님이 주신 그 많은 곡식들을 그저 공으로만 받아 먹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부모님의 그 애면글면한 삶을 이해는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어설픈 농군의 딸의 목소리가 우수상으로 뽑힌 것이다.
수상 소식 역시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의 방학을 맞아 고향집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들었다. "축하합니다. 농촌체험기 우수상에 뽑히셨습니다. 8월30일에 시상식이 있을 예정이고, 부상으로는…." 얼마나 놀라고, 또 엄마에게 죄송하던지 부상을 설명하는 대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향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수상소식을 엄마에게 전했다. 무슨 상이든 받기만 하면 된다는 엄마였기에 당사자인 딸보다 더 기뻐해주셨다. 그런데 상을 받게 된 이유를 듣고 나서는 수상소식만큼이나 황당한 말씀을 남기셨다.
"밭 하루 맸다고 상을 주믄은 나는 상을 다발로 갔다줘도 부족허겄다 근디 밭 잘 매서 밭은 상이라고 호맹키(호미)를 주는 것은 아니겄지야?"
그때서야 부상이 어떤 건지 궁금해져서 전화를 걸어봤다. 부상은 베트남 하롱베이와 하노이연수였다. 결국 아이들 때문에 여행을 포기하긴 했고 나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엄마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가도 못허는 외국여행인디 차라리 호맹키 한자리가 더 낫겄다!"
물론, 연수를 못가는 대신 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돈의 일부는 "호맹키라도 주라 해라"하시던 엄마에게 드렸다.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그때 엄마의 마지막 말이 지금 생각해도 나를 웃음 짓게 한다.
"놀지 말고 날마다 써라… 암껏도 안 하고 앉아서 글만 쓰믄 돈을 주는디 니가 놀믄 안된다. 게으르믄 죽어야 되는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