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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산의 바위 능선
황장산의 바위 능선 ⓒ 정성필
황장산 정상에 텐트를 치고 촛불을 켰다. 일기를 쓰기 위해 노트를 꺼냈다. 글을 쓰는 동안 불빛을 따라 나방이며 벌레들이 텐트주위로 몰려든다. 나방의 날갯짓이 텐트의 벽을 파르르 때린다. 파닥거리는 소리가 낯익다. 별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사방이 고요했다. 별빛이 촘촘히 텐트 위로 떨어져 내리고 달빛이 가까운 나무에 그림자를 드리워 기괴하다. 달빛이 부서지는 정상의 돌바닥은 금빛이다. 희고 하얀 달빛이 백두대간 능선 마다 부드럽게 흐렀다. 달빛에 낮 동안 걸어왔던 길이 보이는 듯했다. 아직도 숨소리가 묻혀 헐떡이는 듯한 능선에는 식지 않은 땀방울과 바위에는 삶과 죽음의 매달림으로 외쳤던 소리까지 단단하게 붙어있는 듯했다.

사방은 고요했다. 바람 한 점 없다. 여기 까지 걸으면서 나는 많은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장쾌한 백두대간의 능선이 보여주는 파노라마 같은 풍경이 좋았다. 다음에는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쳐갈 때 좋았고, 목마름 가운데 만난 샘물이 반가웠으며, 가는 길 내내 먹거리가 되어주는 참나물이며 취나물로 인해 행복했다. 길이란 떠남이 힘들지 일단 길에 들어서면 만나는 모든 낯설음 때문에 설렌다. 낯설음이 있어서 신비롭고 신비하기 때문에 또 길을 나설 수 있다. 그래서 길이란 떠나야 한다.

밧줄 구간중 하나
밧줄 구간중 하나 ⓒ 정성필
대미산이 보이는 바위(전망바위)
대미산이 보이는 바위(전망바위) ⓒ 정성필

이제 백두대간의 구간 중 거의 반을 온 듯하다. 나는 이 길을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얼마나 더 가야 나의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채워질 것인가? 별똥별이 떨어진다. 언제나처럼 북두칠성을 찾았다. 앞으로 며칠만 더 가면 저 북두칠성을 따라 북쪽으로만 가면 된다.

백두대간 중 거의 절반을 왔다. 되돌아보면 많은 것이 변했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나는 변하기 위해 백두대간을 시작했다. 나는 변하고 있었다. 우선 몸이 변했다. 산행 초기 힘든 걸음을 이겨내지 못해 쓰러지고 까무러치던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변했다. 지금은 다리에 맥이 풀려 넘어지는 일도, 힘들어 기절하는 일도 없다. 변한 몸이 나를 가게 만들고 있다. 나의 발걸음은 내 몸과 내가 짊어진 무게를 지탱하고 나를 실어 나르고 있다. 내 몸은 이제 힘센 경운기처럼 백두대간을 걷고 있다. 내 몸에게 고마워한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촛불을 껐다. 달빛이 만들어 놓은 나무 그림자가 텐트 벽에 실루엣으로 얹혀있었다. 잠이 별처럼 쏟아졌다.

아침이다. 늑장을 부린다. 어제 많이 걸었던 탓에 오늘은 좀 늦게 출발하고 싶다. 아침을 먹기 위해 정상 부근을 돌아다니며 나물을 뜯었다. 정상에는 아침에 먹을 만큼의 취나물이 있다. 향긋한 취나물 쌈에 밥을 먹고 다시 배낭을 꾸렸다. 오늘 가는 길은 얼마나 험할까? 아마도 벌재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험한 길로 다녀야 할 것이다.

황장산 약수터
황장산 약수터 ⓒ 정성필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밧줄 잡고 내려 서야하는 구간이 나왔다. 칼 날 같은 능선이 이어지고, 나는 좌우의 균형을 잡으며 칼바위 능선을 걸었다. 좌나 우로 치우치면 벼랑으로 떨어진다. 떨어지면 끝이다. 칼바위 능선에서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우는 순간 끝이다. 중심을 잡아야 끝까지 갈 수 있다. 바람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칼바위능선을 지나 잠시 앉아 글을 쓰다 보니 산짐승들이 마루금을 따라 이동한다. 처음에는 족제비가 지나가더니 다음에는 뿔이 있는 사슴과 눈을 마주쳤다. 물론 둘 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사슴의 눈은 아름다웠다. 사슴은 번개처럼 도망 가버렸지만 뱀은 사람이 있는데도 눈치를 못 챘는지 여유롭게 스르륵 지나간다. 이름 모를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나와 눈싸움을 하고 있다. 아마 나를 투명인간 쯤이나 혹은 덩지 큰 산짐승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놈은 미동도 하지 않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다시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구간이 나온다. 황장산은 험한 길로 이어진다. 처음엔 밧줄이 나오면 힘들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밧줄 구간이 나오면 오히려 안심이다. 힘들게 혹은 목숨을 걸고 가야할 길에 밧줄이 놓여있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밧줄을 깔아 놓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밧줄이 나오면 곤란한 것도 있다. 등 뒤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배낭 때문이다. 내 몸 하나만 가늠한다면 문제될 일 없지만 등에 지고 가야하는 것 때문에 중심을 잡기 힘들다. 중심만 잘 잡는 능력만 있다면야 밧줄 구간이든 험한 구간이든 상관없다. 나는 깨닫는다. 삶도 마찬가지라고. 아무리 버거운 짐을 지고 가는 험난한 길이라도, 중심만 잡으면 된다고.

문복대
문복대 ⓒ 정성필
잠간 앉아 쉬는 바위가 전망이 좋다. 대미산이 보인다. 나는 바위에 앉아 기도한다. 새들도 나무도 놀라지 않게 조용히 속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기도한다. 내가 아프게 만들었던 사람 때문에 아파온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한참을 그렇게 흐느끼며 앉아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을 위해 그리고 내가 아프게 했던 사람들과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한다.

가는 길에 의수 장애인을 만났다. 한 손이 없는 분인데, 백두대간을 하고 싶은데 가능하겠는지 묻는다. 의지만 있으면 가능할 거라 했다. 어느 구간이 가장 어렵냐고 물어, 황장산만 종주하신다면 백두대간 이전 구간 중 특별히 어려울 것 없다 했다.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나와 헤어졌다. 도전한다는 것, 도전 할 수 있다는 것, 나를 극복하는 것은 행복이다. 도전할 수 있음만으로도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 평범하지만 누구나 다 평범함을 넘어서려 한다. 넘어서려는 시도는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고 싶은 욕구에서 도전한다. 살아있음은 아름답다. 살아있는 사람은 도전한다. 도전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저수령 가는 길
저수령 가는 길 ⓒ 정성필
벌재로 내려섰다. 물이 필요해 벌재 약수터로 갔다. 배낭이 무거워 배낭을 문복대 가는 들머리에 놓고 물통만 들고 도로를 따라 걸었다. 걷다 보니 간이 휴게소가 보였다. 약수터는 휴게소 옆에 있었고 휴게소에는 아주머니 두 분이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점심으로 국수를 시켜 먹었다.

다시 배낭을 메고 문복대를 넘어 저수령으로 향했다. 문복대 정상은 돌 위에 표지석이 있었고 나무로 둘러싸인 정상은 전망이 좋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날이 더워 계속 물을 마셨다. 벌재에서 3L가 넘는 물을 가져 왔는데 벌써 2L가 넘는 물을 마셨다. 옥녀봉을 지나 저수령으로 향했다. 이미 7시가 넘었다. 저수령에 도착하자마자 텐트를 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저수령 내려가는 길은 가팔았다. 조심해서 내려가니 놀랍게도 저수령에는 반가운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5월 16일 부터 7월 4일까지 했던 백두대간 연속종주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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