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으로 인한 불편 가중, 여론 악화, 노-노 갈등, 협상 지지부진, 그리고 긴급조정권 발동. 정부는 11일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 파업에 대해 긴급 조정권을 발동했다.
8일 0시1분을 기해 파업에 돌입했던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원들은 긴급조정권이 발동됨에 따라 파업을 중단하고 업무에 복귀해야 하며, 30일 동안 모든 쟁의행위가 금지된다. 또한 대한항공 노사 양측은 중앙노동위원회의 강제 중재 절차를 받아야 한다.
긴급조정권 발동은 지난 8월 아시아나항공 조종사 파업에 이어 올해만 두번째다. 긴급조정권은 국민경제를 위협하거나 국민의 일상생활을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될 때 노동부장관 직권으로 발동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긴급조정권 발동 올해 두번째
긴급조정권이 발동되자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와 노동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가 회사 편에 서서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유린했다는 것이다.
신만수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 위원장은 "정부가 1년에 두번씩이나 법의 미명하에 저지른 단체행동권에 대한 탄압은 길이 기억될 것"이라며 노동부의 결정에 유감을 표시했다. 이어 신 위원장은 "조합원들의 유례없이 높은 파업참가는 그동안 대한항공 사측이 진행한 갖가지 교묘한 탄압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라며 "회사는 정부의 긴급조정권 뒤에 숨어 교섭을 회피하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의 파업은 시작부터 '돌파구'가 없는 고립된 싸움이었던 만큼 명분이 약했다는 지적이다. 항공 안전 운항이라는 공익적 요구는 지난 8월 단체협상 당시 이미 마무리된 만큼 이번 파업은 임금 인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노조는 지난해와 올해 회사의 수천억원 영업 이익을 근거로 임금 인상을 요구했지만, 회사는 일반 노조와의 형평성을 제시하며 기존 입장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회사는 조종사의 고액연봉과 파업으로 인한 결항, 그리고 이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부각시키면서 국민 여론과 정부에 호소했다. 여기에 대한항공 일반 노조가 조종사 노조의 파업을 '제 밥 그릇 챙기기'로 비판해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의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노·사의 자존심 싸움
이번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의 파업은 노사의 자존심 싸움 성격이 짙었다. 대한항공은 "조종사 노조 파업의 목적은 임금 인상이 아니라 해고자 3명의 복직"이라며 불법 파업을 주장하기도 했다.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는 지난 2001년 파업으로 대량 구속 사태가 이어졌고 그 결과 위원장, 사무국장, 부위원장이 해고돼 여전히 복직이 되지 않은 상태다. 회사는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를 만든 핵심인 이들 3명을 절대로 복직시킬 수 없다는 입장인 반면, 노조원들은 사석에서 "이들이 복직되면 임금 인상 정도는 양보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다.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는 회사에 대한 불신과 함께 결속력이 강하다. 여론의 비판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이 전체 조합원 1300여명 가운데 1000여명에 이른다. 외국으로 비행 나간 조합원들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높은 파업 참석률이다.
파업에 참가한 대한항공 조종사 이아무개(39. 부기장)씨는 "회사는 앞으로 정치권에 항공 산업의 필수공익사업 지정을 요구해 파업권을 제한하려 할 것"이라며 "이번 파업에서도 운항하는 것이 적자인 국내기와 상대적으로 문제가 적은 화물기를 결항시키면서 양보안조차 내밀지 않았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회사도 노조에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회사 관계자는 "고액 연봉자가 대체 인력이 없다는 점을 이용해 상습 파업을 하고 있다"면서 "조종사들 요구만 들어주면 나머지 직원들은 뭐가 되겠느냐"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노·사·정 모두에게 남은 상처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의 이번 파업은 노·사·정 모두에게 상처를 남겼다. 회사는 핵심 인력인 조종사들과 어떤 식으로든 협력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서 신뢰에 금이 생겼다. 밖으로는 파업에 참가한 조종사들에게 비판을 쏟아냈지만, 파업이 종료된 이상 다른 해결 방법이 필요하다.
노조도 '고액 연봉자 파업 비판론'이나 노-노 갈등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매번 고립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대체 인력이 없다는 특권에 안주하고, 지금처럼 기업 노사 관계 틀 속에 갇힐 경우 지지를 이끌어내기 힘들다.
정부 역시 올해 조종사 노조 파업에만 유례없이 긴급조정권을 2차례나 발동한 것이 부담일 수 밖에 없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노사 자율을 강조하던 참여정부의 정책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과 정부가 항공사업 필수공익사업장 지정을 통해 조종사 노조의 파업권을 제한하려는 움직임 대신, 조종사의 특수성을 감안한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해 노조와 머리를 맞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