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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엔이미디어
어느 밤 KBS 1FM <정다운 가곡>에서 들려주던 바리톤 김진섭의 '귀천'을 듣고 난 후 한 번 더 듣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이미 한번 들려주었기에 또 언제 틀어줄는지. 언제일지도 모르는 날을 기다리자니 아쉽고도 아쉬웠다.

불을 끄고 조용한 가운데서 듣는, 저음으로 느리고 나직이 그러나 온 어둠을 삼킬 듯한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는 경건하고도 경건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 말하리라.

그동안 아이들 때문에 CD나 테이프를 듣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뭐 좀 들으려고 테이프를 넣으면 녀석들이 마구 눌러 대거나 테이프 필름을 뽑아서 못 쓰게 만들어 놓기 일쑤였다. CD 또한 CD를 갖고 놀다가 긁어놓아서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때문에 아예 틀지 않는 것이 남는 장사였다.

그랬는데, 김진섭의 '귀천'을 들은 후 반복해서 자꾸 듣고 싶다는 욕망이 꺼지질 않았는데, 마침 <정다운 가곡>에서는 'FM 신작 가곡집'이 나왔다며 선전을 하기에 얼른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했다.

그리고 며칠 후, CD를 받자마자 솔숲에서 솔향기를 들이키듯 연거푸 '귀천'만 반복해서 청취했다. 반복해서 원 없이 들으니 마음의 배가 좀 불러 오는 것 같았다. 해서 이번에는 여유를 갖고 처음부터 차곡차곡 들었다.

'압해도'라는 섬은 도대체 어디쯤 있는 것일까.

섬진강을 지나 영산강 지나서 가자 친구여 / 서해바다 그 푸른 꿈 지나 / 언제나 그리운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가자 / 창밖엔 밤새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 / 친구여 바다가 몹시도 그리운 날은 /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섬 압해도 압해도로 가자…

평소 많이 듣던 노래지만 가사를 앞에 두고 눈으로 읽으며 들으니 느낌이 배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막연히 제목을 '전라도 땅'이라고 알고 있었던 노래는 알고 보니 정공채 시인의 '섬진강'이었다. '섬진강'은 김용택 시인 전속인줄 알았는데 정공채 시인의 '섬진강'도 가히 걸작이었으며 거기다 음률을 곁들이니 금상첨화였다.

산두고 숲을 두고 복사꽃 피는 마을도 돌아 / 인정도 고운 전라도 땅 / 그 들판 비단결 굽이굽이 감돌며 / 하늘에 흰 구름 누비듯 흰 구름 누비듯 / 흘러 흘러 남으로 가는 고운 섬진강 / 내 마음 내 사랑 이 강물 / 물빛 되어 당신을 당신을 떠올리네…

'상주 함창 맑은 물에'는 주로 남자 성악가의 목소리로 많이 들었는데 소프라노 양혜정의 목소리로 들으니 그 느낌이 또 확 달랐다. 성량이 얼마나 풍부한지 그리고 얼마나 노래를 새침하게 잘 부르는지 상추 씻는 아가씨에게 홀딱 반한 총각의 마음은 물론 어마어마한 조건을 내거는 아가씨의 도도함을 유쾌하게 잘 그려주었다.

상주 함창 맑은 물에 상추 씻는 저 아가씨 / 상추 잎은 내가 씻어 줄게 우리부모 섬겨주소 / 길가는 저 총각아 그런 말 하지 마오 / 언제 봤던 님이라고 당신 부모 섬기겠소 / 누구는 나면부터 구면이던가 아까는 초면이고 지금은 구면이지…

가곡은 무엇보다 '시'와 '음악'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에 좋다. 시는 시 자체로도 존재의의가 있겠지만 음악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고 할까. 그것도 아주 멋지고 세련되고 감동적으로. 나의 경우 시에서는 좀처럼 감흥을 느낄 수가 없는데 그 시에 가곡의 음률을 깔아주면 시가 달라 보인다.

그러한 작업을 해주는, 시에다 음악이라는 옷을 입혀주어 시와 음악을 함께 살리는 신작가곡을 작곡하는 사람들이 너무 존경스럽다. 그리고 그것을 우아하게 불러주는 수많은 성악가들 또한 가장 부러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가곡반주의 마력이다. 반주가 얼마나 화려한지. 88개 건반 전체를 휩쓰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전혀 소란스럽지 않고 우아하고 묵직하게 넘실넘실, 반주라는 포지션을 잃지 않는가 하면 때로는 숭어와 망둥이가 힘을 합쳐(?) 숨 가쁘게 건반을 튕겨도 못 따라잡을 폭풍 같은 반주로 열정적인 피아노 소나타의 느낌을 준다. 가곡의 기본 뼈대(멜로디)는 뼈대대로 편곡은 편곡대로 멋지다.

CD 겉표지에 보니 'KBS FM 한국의 신작가곡 시리즈 1'이라고 되어 있다. 벌써부터 시리즈 2, 3, 4…가 기대된다. 과연 어떤 노래들로 채워질거나. 기다림만으로도 생각만으로도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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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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