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풍산부인과>가 방송될 무렵 난 세 살, 네 살 밖에 안 된 어린 애 둘을 키우느라 정신없고 지쳐있던 그런 아줌마였다. 별난 애들을 둘씩이나 데리고 어디 갈 데도 없어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애들하고 싸우느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던 내게 유일한 구원은 <순풍산부인과>를 보는 시간이었다. 그 프로를 보고 있노라면 스트레스가 다 사라지고, 새로운 힘을 얻곤 했었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지금 우연히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가 <순풍산부인과>를 보게 됐다. <순풍산부인과>는 1998년 3월에 시작해서 2000년 12월에 막을 내렸다.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 전에 방송됐던 작품이라 패션이나 화장법이 지금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당시는 입술을 새빨갛게 칠하는 등 대체로 진한 화장이 유행이었던 것 같은데, 수수하게 화장하는 지금의 화장법에 익숙해서인지 당시의 진한 화장이 좀 촌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캐릭터 설정이나 극의 구성 면에서는, 요즘 시트콤이 후퇴한 것 아닌가 할 만큼 전혀 촌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요즘 나오는 시트콤을 압도했다.
1998년 3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총 682회를 방송하는 동안 마니아를 양산했을 뿐만 아니라 시청률 면에서도 평균 21%를 유지하는 등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추었던 시트콤 <순풍산부인과>. 시트콤은 이런 공식 안에서 이런 종류의 인물과 이런 유형의 웃음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시트콤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 시트콤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구조와 세계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섹스 앤 시티>와 같은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시트콤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순풍산부인과>는 신선하고 재미있다. 이런 <순풍산부인과>의 성공은 캐릭터의 창조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어필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는데, 이들은 당시 한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세대 차이를 보여주는 그런 캐릭터였기에 더욱 깊이 있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때 당시 우리 사회에는 세대별로 묶어서 표현하는 호칭이 유행했는데, '386세대'니 'X세대'니 하는 말들이 그런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각 세대들이 나름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순풍산부인과>의 캐릭터는 이런 세대별로 갖고 있는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었고, 이런 세대 차이가 긴장과 갈등을 초래하면서 또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기성세대의 권위의식과 체면, 그리고 가부장적인 면모는 오지명 캐릭터를 통해서 표현됐고, 그리고 박영규를 통해서는 '386세대'라고 할 수 있는 세대의 실리주의와 가족애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X세대'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 욕망에 대한 충실함, 이런 특성은 허영란 캐릭터를 통해서 표현됐다.
권위를 상징하는 오지명은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어른 대접에 목말라한다. 체면과 권위를 중요시하고, 수직적이고 형식적인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그런 인물이다.
그래서 관련 에피소드는 대체로 그의 권위의식과 보수적 성향이 외부에서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야기되는 긴장과 갈등을 표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산부인과 병원의 원장인 오지명은 간호사나 다른 고용 의사와의 관계에서 수직적인 관계를 추구하며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아줌마스럽고 억센 김 간호사가 오지명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갈등이 일어나고, 체면을 중시해서 먹고 싶은 게 있어도 참다가 도저히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허 간호사의 초콜릿을 몰래 훔쳐 먹다가 체면에 손상을 입기도 하는 등 오지명의 캐릭터는 체면과 권위의식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
집에서의 모습 또한 병원에서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자상한 아버지나 남편의 역할보다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중심을 두는 편이다. 그래서 아내를 자신과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기보다는 종속적으로 보고, 딸들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질그릇과 여자는 내돌려서는 안 된다'는 가치관의 신봉자인 오지명은 딸 혜교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면서 딸의 행동을 감시하는 등 집 안에서도 보수적이고 권위적으로 행동한다.
체면과 권위에 목숨 거는 오지명과 달리 박영규 캐릭터는 실리를 중요시한다. 다른 사람의 자신에 대한 평가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박영규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이익과 보상인 것이다. 지극히 현실주의자고 실리주의자라 할 수 있다.
30년 지기 친구를 잃을지언정 술값 35만원을 아끼는 것에 더 무게를 둔다던지 남의 집에 가서 염치도 없이 뻔뻔스럽게 냉장고 문을 마음대로 열어 마구 먹기도 한다. 박영규의 관심은 체면이 아니라 물질적인 실리다.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박영규는 가족애가 강하다. 타인에 대해서 그토록 인색하고 염치도 없는 인간이지만 자기의 가족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다. 아내에게는 애교 많고 자상한 남편이고, 딸 미달에게는 누구보다도 좋은 아빠다.
그리고 신세대를 대표하는 허영란 캐릭터는 아주 새로운 느낌의 캐릭터다. 이전의 어떤 소설에서이나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한 인물이다. 그만큼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과 생활패턴은 기성세대에게는 낯설었다. 그래서 이들 새로운 세대를 'X세대'라 칭하고 그들의 특징을 열거하는 작업을 텔레비전 시사프로에서 보여주기까지 했었다. 이런 시대 흐름에서 튀어나온 캐릭터가 '허영란'캐릭터다.
우선 허영란 캐릭터는 자기의 욕구에 충실하다. 권오중에 대한 집요함만 봐도 알 수가 있다. 권오중에게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도 기도 죽지 않고 구애를 계속하는 것만 봐도 상대의 감정 보다는 자기감정을 중요시함을 엿볼 수가 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욕구에 충실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실리를 밝히고 욕구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박영규와 허영란 캐릭터를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분명 다르다. 박영규는 물질적으로 인색하고 체면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고, 물질에 대한 탐착을 보이지만 소심하고 상처도 잘 받고, 가족에 대한 애정이 많은 굉장히 인간적인 느낌의 캐릭터다. 반면 허영란에게선 인간적인 느낌 보다는 기계적인 느낌이 더 든다. '권오중을 좋아해라' 오직 그 주문만 입력된 로봇처럼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고 또 주변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X세대를 이해할 수 없는 그룹으로 생각했던 당시의 가치관의 반영이라고 본다.
캐릭터 창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 사회와 우리 주변 인물에 대한 관찰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분명 우리 것이 분명한 우리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신선한 웃음이 유발되는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순풍산부인과>의 성공은 예견됐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