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찌 이리 기구할 수 있을까.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107세 엄마는 거동이 불편해 거의 움직일 수 없고, 77세 딸은 시력을 잃어 더듬거리며 생활한다. 엄마는 눈, 딸은 손발이 되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1899년생인 심경림 할머니와 1929년생인 이승은 할머니. 모녀는 딸의 나이만큼 질기디 질긴 혈육의 끈을 이어왔다. 지난 17일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에 위치한 모녀의 집을 찾아 그들의 삶을 들여다 봤다.
107세 엄마는 눈, 77세 딸은 손발이 되어 함께 사는 모습
어머니 심씨 할머니는 지난해까지 바깥 출입을 했지만 지금은 노환으로 인해 거동을 거의 못한다. 하지만 정신은 맑았으며 의사소통도 가능했다. 이날 모녀와 함께 자리했던 박흥윤 목사(45·장애1급)는 심씨가 "99세 되던 해까지 거리의 휴지를 줍는 등 취로사업에 꼬박꼬박 나가셨다"며 "지금은 누웠다, 앉았다 하시는 게 전부지만 정정하신 편"이라고 귀띔했다.
딸 이씨 할머니는 환갑이 넘어서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었다. "후천성 장애가 더 힘들다"고 전한 박 목사는 "눈이 보이진 않지만 엄마가 먹고 싶다는 것은 꼭 만들어드리는 등 힘든 중에도 효성이 지극하다"고 말했다. 이씨 할머니에게 제일 힘든 것은 어머니 기저귀 갈아드리는 일. 아무래도 눈이 보이지 않으니 대소변을 해결해주기가 어렵다고.
3세기를 관통해 살아오신 심씨 할머니와 다른 집 같으면 최고 어른으로 모셔질 이씨 할머니에게도 피붙이는 있을 터. 두 분을 모실 다른 가족은 없느냐고 조심스럽게 여쭸다. 모녀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은 '충격'이었다. 먼저 심씨 할머니의 사연.
"14살 때 용인으로 시집가서 11명의 자식을 뒀었지. 근데 6·25때 10명을 잃었어. 업고 있는 아기도 총에 맞아 죽었는데 뭐. 승은이는 다행히 피난 갔다 살아 돌아왔고. 아, 그리고 막내딸이 하나 더 있는데 그 애는 내가 52세쯤인가 출산했지. 하지만 막내도 2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를 입었어."
기구하기는 딸의 삶도 어머니 못지 않았다. 이씨 할머니가 털어놓는 사연을 들으며 할 말을 잃다 못해 정신이 백지처럼 하얗게 질렸다.
"16년 전쯤 시력을 잃었는데, 그 땐 어머니도 병원에 입원하셔서 혼자 지내야 했어. 근데 밥을 해 먹을 수 있나, 연탄불 갈다가 손 다 데이고, 정말 죽고 싶더라고. 그래서 수면제 사다가 자살하려고도 했지. 문 밖으로 나가다가도 사람 소리가 들리면 다시 들어올 정도로 사람 만나는 게 싫었어. 피난 갔다 온 후 6살이던 딸을 잃어버렸고, 마흔 아홉 살 먹은 아들은 사업 하다가 부도가 나서 내가 도와줘야 할 형편이야."
"어머니 기저귀값 감당하기도 벅차다"
모녀는 14평 영구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들의 생활비는 영세민기초생활수급자에게 정부가 지급하는 월 40만원이 전부. 그나마 군포복지관이 독거노인용 도시락을 하루 한 끼 제공하는 것이 위안이다. 이씨 할머니는 "어머니 기저귀값 감당하기도 벅차다"고 생활고를 토로했다.
박 목사는 두 모녀를 만나게 된 사연을 이렇게 말했다.
"95년도에 두 분이 이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알게 됐어요. 저도 요 위층에 살거든요. 그 때 제가 풀빵, 인절미, 호떡 등을 사다 드렸는데 먹고 살기 어려운 게 보였어요. 어찌나 잘들 드시는지…. 그렇게 저를 반겨주시면서 바깥 출입을 하게 된 거죠."
이씨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바깥나들이를 한다. 하지만 그것도 교회에 다녀오는 '1시간' 정도이다. 집에 홀로 있는 어머니 생각 때문에 바깥에 오래 머물 수 없다. 딸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심씨 할머니는 연신 입을 오물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숨 쉬기도 말 하기도 힘들어 보였지만, 눈만큼은 딸의 옷에 묻은 머리카락을 떼어 낼 정도로 밝았다. 그에 비해 딸은 눈만 안 보일 뿐이지 77세 나이로는 도저히 판단이 안 될 정도로 고왔다.
시각 장애인 딸과 거동이 불편한 노모. 이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볼 수록 생명의 고귀함이 느껴졌다. 모녀가 굳게 맞잡은 손은 무엇을 의미할까. 박 목사가 12년간 모녀를 지켜본 느낌을 이렇게 전했다.
"어머니는 시각장애를 입은 딸을 보며 눈 밝게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넘쳐나는 것 같고, 딸은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 생각에 힘들어도 살아야 한다는 희망을 갖지 않나 싶어요. 서로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어머니는 딸 걱정, 딸은 어머니 생각
모녀가 생활하는 작은 방과 주방 등은 매우 깨끗했다. 박 목사는 시각장애인들이 오히려 더 깨끗하게 지낸다고 말한다. 만난 지 1시간이 흘렀을까, 딸이 커피 한 잔을 내왔다. 커피 잔이 놓인, 누렇게 색이 바란 쟁반에 눈길이 머물렀다. 심씨 할머니에게 얼마나 된 쟁반이냐고 물었더니 "47년 됐다"고 답한다. 107세 드신 어르신의 기억력 치고는 너무 또렷했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 "3시입니다"라는 알람이 들렸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계 밑으로 번호판이 커다란 전화기가 눈에 띄었다. 이 역시 엄마와 딸을 위한 것일 터. 이씨 할머니에게 물었다. 전화 자주 하시냐고. 웃음과 함께 돌아온 답변은 "받는 것만 한다"였다. 전화 걸고 싶어도 못 건다고.
급해서 목사님이라도 불러야 할 땐 어쩌느냐고 물었더니 역시 이씨 할머니가 "인터폰으로 해요"라고 웃으며 답했다. 같은 아파트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두 분 곁에 목사님이 계셔서 천만다행이라고 하자 박 목사도 따라 웃었다.
"다 먹고 싶어. 근데 돈이 있어야 사 먹지"
자리를 마무리할 때쯤, 심씨 할머니에게 큰 소리로 여쭸다. 지금 제일 드시고 싶으신 게 뭐냐고.
"빵도 먹고 싶고, 쵸코파이도 먹고 싶고, 고기도 먹고 싶고… 다 먹고 싶어. 근데 돈이 있어야 사 먹지."
드시고 싶은 것을 한아름 품고 다음에 찾아오겠다고 인사를 하자, 심씨 할머니는 "언제 온다고? 언제 온다고?"를 반복했다. 이씨 할머니가 "큰 일이네, 젊은 기자 양반 언제 오느냐고 어머니한테 매일 들볶일 거 생각하니까"라며 웃었다.
박 목사도 어르신이 약속은 정확하시다며, 괜한 말씀 드렸다고 탓했다. 나는 '꼭' 다시 찾아 뵙겠다고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섰다. 자기 것만 챙기기에도 급급한 세태에 이날 만난 모녀는 함께 보듬는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사람은 누군가를 돌볼 때 살아가는 힘이 더욱 솟아날 터. 두 어르신이 내게 준 연말 선물은 그런 가르침이 아닐까. 도움을 드리고자 찾았던 발길이, 돌아서 보니 결국 나를 도운 것 같다.
취재를 마치고 도착한 금정역. 엄청난 한파 속에 익숙한 '구세군' 냄비가 보였다. 나는 주머니의 동전을 몽땅 털어 넣은 후, 모습도 어여쁜 아가씨와 늠름한 청년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고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가슴을 울렸다.
"불우한 이웃을 도웁시다! 딸랑딸랑."
덧붙이는 글 | 기사와 관련 많은 분들이 연락처와 기부 방법 등을 문의하셨는데요. 집 전화를 가르쳐 드리면 두 어르신이 너무 피곤하실 것 같아 목사님 연락처를 공개합니다.
박흥윤 목사 011-9004-2204
직접적인 후원을 원하신다면 박흥윤 목사님과 협의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