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혜(42): 아침에 눈뜨면 컴퓨터부터 켜는 신세대 아줌마. 하지만 TV 리모콘 없이는 살 수 없는 남편을 만나 드라마에 푹 빠졌다. 리모콘 쟁탈전을 피하려고 TV를 한 대 더 장만했을 정도. 뜬다 하는 드라마, 특히 멋진 남자가 나오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부모님 전상서>에서 열연한 탤런트 김해숙씨를 좋아한다.
이동환(45): 학원에서 새벽에 퇴근해 실내자전거를 타면서도 드라마를 보는 열혈 드라마 광. 한 번 빠진 드라마는 인터넷 다시 보기 서비스로 챙겨 보고, 정서적으로는 아줌마에 가까워 여성 취향의 드라마를 선호한다. <장밋빛 인생>에서 푼수 연기의 압권을 보여준 중견 연기자 김지영, 나문희씨를 좋아한다.
지난 20일 드라마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김정혜 시민기자와 이동환 시민기자가 만나 2005년 한국 드라마에 대한 쾌도난담을 펼쳤다.
<불멸의 이순신>, 한국 남자들을 울리다
김정혜(이하 정혜): "아저씨도 <불멸의 이순신>(KBS1) 봤죠? 우리 남편, 마지막 회 보면서는 울기까지 하더라니까. 나 원 참, 남자가 꺼이꺼이 눈물 뚝뚝 흘리는 모습 보니까 좀 그렇대. 사실 저는 옆방에서 다른 드라마 봤거든요."
이동환(이하 동환): "저도 울었는데요? 드라마 보다가 남자가 울면 경찰이라도 출동한데요? 처음에는 이순신의 청년기를 지루하게 끌어서 좀 그랬는데 후반 가면서 선조와 갈등하는 것도 나오고, '인간 이순신'의 면모를 볼 수 있었잖아요. 남자들도 술자리에서 그 드라마 얘기 정말 많이 했어요."
정혜: "올해는 이순신, 장보고, 전두환, 신돈처럼 역사드라마가 많아서 남정네들이 좋았겠어요. 그래도 남자들이 여자 얘기 안하고 드라마 얘기할 정도면 정말 이순신 붐이긴 했나 봐. 전 멋진 '염장' 송일국이 나온 <해신>(KBS1)이 좋던데(웃음)."
동환: "드라마는 여자들만 좋아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토론이랄 것까지는 없고요. 이순신이 선조와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잖아요. 그게 자살이냐 아니면 타살이냐, 역사의 진실은 뭘까, 뭐 이런 얘기가 안줏감으로 올랐죠."
남편과 맥주 한잔 하면서 삼순이랑 연애하기
정혜: "'이순신'할 때는 남편이 숨소리도 못 내게 했었는데 그래도 <내 이름은 김삼순>(MBC)은 남편이랑 맥주 한 잔 하면서 봤어요. 우린 TV 볼 때는 각방 쓰는데 삼순이는 예외였다니까요. 사실 저보다 남편이 더 좋아했어요."
동환: "삼순이는 정말 남자들한테는 일대 충격이었어요. 만날 미끈한 여자만 보다가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르지 않고, 잘나지 않은 삼순이를 봤을 때의 충격이란... 정말 할 말을 잃었다니까요."
정혜: "우리 남편은 삼순이가 자기 애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랬어요. 늦바람 난 것 같았다니까요. 삼순이 재방송 본다고 밤 꼴딱 새고 곧장 일 나가고 김선아 나오는 비디오는 다 찾아보고... 왜 그렇게 좋으냐고 했더니 내숭 안 떨고 시원시원한데다가 솔직하고 화끈해서 좋다고 하대요."
동환: "전 삼순이 언니(이영)가 참 인상적이었어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여성의 모습이었잖아요?"
정혜: "그렇죠. 마음에 드는 남자랑 하룻밤 자고 수표 한 장 착 던지는 모습, 잊을 수가 없죠. 바람나지 않고서야 우리 아줌마들은 그런 거 못해 보잖아(웃음). 만날 질질 짜는 여자 말고 당당한 여자들도 많이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올해 호주제가 폐지됐는데 <굳세어라 금순아>(MBC)는 그것하고 맞물려서 괜찮았던 것 같아요. 작위적인 설정에 스토리가 식상하기는 했지만..."
왜 아줌마들은 다니엘 헤니에 열광할까?
동환: "그러고 보니 올해 히트 친 드라마 주인공이 삼순이, 금순이, 맹순이, 전부 다 여자에 '순이'네요. 근데 드라마 속 여자들은 날이 갈수록 슈퍼우먼에 억척이가 되어 가는데 남자들은 왜 현빈이나 다니엘 헤니 같이 야리야리하고 예쁜 꽃미남이 되어 가는 거야? 나 같은 사람들은 TV에 얼굴도 못 내밀겠더라니까."
정혜: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이젠 <사랑이 뭐길래>(MBC)의 '대발이' 같이 강한 남자는 안 맞아요. 강한 남자보다는 부드러운 남자를 좋아하죠. 현빈이나 다니엘 헤니, 다 부드러운 남자잖아요. 그나저나 다니엘 헤니 생각하니까 얼굴이 빨개지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프라하의 연인>(SBS)에서 김주혁, 얼마나 멋져요? 정말 일어날 수 없는 신데렐라 스토리지만 난 너무 좋더라. 어차피 현실이 아니니까 잠깐 꿈꾸면서 스트레스 잊는 거죠."
동환: "요즘 현실을 반영했던 <불량주부>는 어땠어요? 요즘 사실 남편이 집안일하고 아내가 밖에 나가 돈 버는 집들이 꽤 되거든요."
정혜: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호감을 갖고 봤어요. 근데 드라마가 갈수록 뻔하고 개연성 없는 얘기에 아내 따로 남편 따로 다른 이성과 눈 맞는 얘기로만 흘러가니까 정말 싫어지더라고요."
<장밋빛 인생>, 진부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
동환: "사실 저는 드라마 보는 이유가 딱 두 가지예요. 역사 드라마는 작가의 상상력에 중점을 두고 보고요, 현대극에서는 스토리는 안 보고 오직 배우들 연기만 보죠. 올해 제가 열심히 본 드라마는 사실 모두 문제가 많아요. <장밋빛 인생>(KBS2)이나 <부모님 전상서>(KBS2) 같은 드라마도 중견 연기자들의 끝내주는 연기 때문에 봤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스토리가 터무니 없었어요."
정혜: "그건 그래요. 주인공 죽이기가 무슨 유행병 같아요. <부모님 전상서> 작가 김수현씨도 사실 말 많잖아요. 옛날에 유행하던 뻔한 수법 재탕에 천편일률적인 갈등구조…. 물론 따뜻한 가족애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에 점수를 줄 수는 있지만, 그것도 배우들 연기 때문에 십분 드러난 거죠. 다양한 방식과 스토리가 없는 우리나라 드라마, 너무 아쉬워요. 작가들이 시청률을 너무 의식해 실험 정신을 저버린 것 같아요."
동환: "그렇게 보면 맹순이가 나온 <장밋빛 인생>이 성공한 건 참 의외예요. 전 나문희, 김지영씨 같은 중견 연기자의 노련한 연기만 보이던데 잉걸 엄마는 맹순이 보면서 펑펑 울대. 나는 그저 남편 바람난 얘기 또 우려먹는구나, 또 하나의 통속이거니 했거든요? 그런데 대박 났거든? 동네 아줌마들 모여들게 만든 진짜 이유가 뭔가요?"
정혜: "남편이 바람피우고 시어머니 구박에 결국에는 암까지 걸리고…. 좀 비현실적이긴 해도 맹순이한테는 우리 아줌마들 모습이 보였어요. 그래서 욕하면서도 열심히 봤지. 그런데 그 남편 봐. 구질구질하다고, 여자처럼 안 느껴진다고 밖에 나가 딴 짓거리 하는 거. 아휴, 정말 열불 나더라. 맹순이가 누구 때문에 그렇게 꼬질꼬질하게 살았는데? 우리 아줌마들 그거 보고 무지 열 받았어(웃음)."
동환: "저도 이해는 가요. 그래도 집에서 긴장감 없이 눈곱 잔뜩 낀 모습으로 하품이나 쩍쩍 하면서 퇴근하는 남편 맞는 모습, 저라도 아내가 여자로 안 느껴질 겁니다. 그 점에서 맹순이는 정말 리얼했죠."
정혜: "그래서 사람들이 진부하다, 신파라고 욕하면서도 본 것 아닐까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녹아 있으니까요. 근데 너무 얼토당토않은 스토리로 우리 아줌마들 우롱한 드라마도 많았어요. <세 잎 클로버>(KBS2) <루루공주>(SBS) <슬픈 연가>(MBC)는 정말 짜증나는 걸작(?)이었죠."
동환: "젊은 층 감성을 파고든 <쾌걸 춘향>(KBS2) 같은 성공작도 중년의 시각으로 보기에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죠."
우리 가정의 평화를 위해 멋진 드라마를 보여달라
정혜: "누가 뭐래도 전 <부모님 전상서>를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고 싶어요. 김희애씨가 이혼하고 아버지와 독대하는 장면에서, 몇 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눈빛으로 위로하던 송재호씨 연기, 너무 좋았어요. 따뜻한 가족사랑, 그런 이야기가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동환: "물론 저도 <부모님 전상서> 열심히 봤죠. 그런데 가족사랑 이야기가 무게 있게 다뤄지기는 했지만 우리 같은 세대 사람들만 좋아했던 것 같아요. 비비 꼬기, 써먹은 갈등구조 또 써먹기, 뭐 이런 것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별로 안 본 것 같더라고요."
정혜: "하긴 전체적으로 2005년 드라마에서는 새로움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삼순이의 탄생 정도를 빼면. 중견 연기자들의 탄탄한 연기로 어렵게 어렵게 극을 이끌어간 것 같기도 하고요."
동환: "새해에는 좀 실험 정신이 강한 드라마를 보고 싶어요. 한 얘기 또 하는 그런 거 말고요. 또 신선한 얼굴의 연기자도 보고 싶어요.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실내자전거 타면서 몇 시간씩 드라마 봐도 좋으니까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보여주든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든지 말예요."
정혜: "저도 남편이랑 수다 떨면서 볼 수 있는 드마라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죠.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