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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학 시집-그림자를 마신다
ⓒ 이종암
제22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이윤학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그림자를 마신다>가 출간되었다. 경주 동국대학교를 나온 이윤학 시인은 문단에 술 많이 마시는 시인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나는 나와 동갑내기인 그를 서너 번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그는 술을 물 마시 듯했고, 곧 쓰러져 졸다가 다시 일어나 마시고 또 마셨다. 마치 술과 깊은 연애에 빠진 사람 같았다.

남들처럼 일정한 직업도 없이 그리 술을 마시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얼마 전 아내와도 헤어진 모양인데, 그 개인사의 아픔과 상대에 대한 미안함이 이번 시집의 중요한 내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윤학 시의 특징을 한 마디로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진정성과 묘사의 시학이라 부르면 어떨까. 작품의 내용으로 보면 진정성의 시학이요, 표현으로 보면 묘사의 시학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체'하는 꾸밈이나 엄살이 없다. 우리 시단에 엄살과 과장의 수사적 발림으로 가득 찬 시가 얼마나 무성한가. 표제시인 '그림자를 마신다'에서는 시적 화자가 비온 뒤 관악산 삼림욕장으로 산책 가다 본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데 시의 후미에 가면 그 풍경들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자연스레 얹어놓고 있다.

이런 식이다.

비산농원 울타리 / 푸른 철사 그물에 빗방울이 맺힌다 / 물린 밥상머리에 앉아 눈물 콧물 / 비벼 짜는 네 모습 어른거린다

밥상머리에 앉은 여자에게 눈물 콧물 짜게 만든 궁상맞은 자기 삶을 어느 시인이 시로 내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의 시 쓰기 방식은 진술을 거부한다. 철저한 묘사 방식으로 시를 쓰고 있다. 아니 그려내고 있다.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 더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
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
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
나는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
당신 마음 위에 뜨곤 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 '오리' 전문


시의 화자는 오리다. 이 오리의 상대는 그가 머물고 살았던 호수다. 오리(나)가 호수에 머물며 사는 동안 호수(너)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또 가보지 않은 데가 많아 끝내 그 호수를 떠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너'라는 처소에 머물다 떠나와 버린 '내'가 그때의 너와 나의 어긋난 관계에 대한 회억(回憶)이 시의 내용이다.

여기에서도 시인의 진정성과 묘사의 시작 태도가 두드러진다. 독자에게 설득하려 하거나 무얼 전달하려고 안달하지 않는다. 그저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그려낸 풍경 위에 시인 자신의 솔직한 삶을 가만히 얹어놓고 있다. 이를테면 풍경의 내면화다.

시집 <그림자를 마신다>에서 이윤학 시인은 감정의 넋두리를 남겨놓지 않는다. 시집 뒤 '해설'을 쓴 정병근 시인의 말마따나 "그의 시는 해감이 다 가라앉은 뒤의 물속처럼 맑고 투명하다." 얼른 보면 그의 시들이 감정을 제거하여 딱딱하고 건조한 모습으로 비춰져 재미가 없는 작품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작품을 들여다본다면 시인이 그려내고 있는 시적 행간에 슬픔과 절망이 넘쳐나는 걸 볼 수 있다.

독자들이 이걸 읽어낼 수 있다면 독서의 기쁨은 곱절로 증폭된다. 술과 독한 진정성과 묘사의 시학으로 만들어진 것이 이윤학, 이라는 시다. 동시대에 시인이라는 길을 그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 좋다. 콧소리가 섞인 꼬부라져 가는 목소리, 참된 시어를 찾아 말을 더듬거리는 시인을 옆에 두고 술이 먹고 싶어진다.

그림자를 마신다

이윤학 지음, 문학과지성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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