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 아니 이렇게 부르는 것조차 결코 간단치 않다. 어떤 이들에게는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단지 '병역거부' 혹은 '병역기피'일 뿐이다. 어떤 용어를 쓰느냐, 또 쓰고 싶으냐에 따라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대립과 편차가 분명히 드러난다.
특히 한 사회에서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여러 가치가 서로 충돌할 때, 어떤 판단을 할 것인지는 솔로몬의 지혜를 빌리더라도 풀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게다가 그 문제가 분단상황이라는 한국의 특수성과 관련돼 있는 국방의 의무의 이행 방식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복잡해진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양심적 혹은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 혹은 병역기피 ' 문제를 오랫동안 검토해 왔으면서도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데는 이런 이유들이 있었다. 인권위의 이 같은 '장고'에 대해 어떤 시민단체들은 "직무유기"라며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국가인권위는 10월 19일 오후 을지로 청사 배움터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 청문회를 열고 관련 기관과 시민단체 등의 의견을 청취했다. 위에서 말한 용어상의 혼란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명칭을 쓴 것은 "오랫동안 쓰여 온, 통용되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라는 주최측의 설명이 제시됐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사실상의 병역면제 VS 대체 복무제 도입해야
이날 청문회는 내내 "양심적 병역거부는 사실상의 병역 면제이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견해와 "대체복무제 도입으로 신념과 종교적인 이유로 군대에 갈 수 없는 이들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양심적 병역거부 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인 이석태 변호사는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방의 의무 거부가 아니라 무기를 드는 대신에 다른 형태의 적절한 방법으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게 해달라는 것"이라며 "국제사회의 권고 등을 받아들여 대체복무제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엔인권위원회, 자유권규약위원회 등은 1987년 이후 결의와 일반 논평 등을 통해 종교적·윤리적·도덕적 또는 이와 유사한 동기에서 발생하는, 신념에 기초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각국이 인정하고 다양한 대체복무제를 실시하도록 촉구해 왔다.
'양심적 병역거부 수형자 가족모임' 공동대표 홍영일 씨도 "실제로 양심적 병역거부로 처벌을 받는 나라는 7개국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는데, 앙골라, 아르메니아, 싱가포르, 터키 등 한국보다 정치적 수준이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는 나라들이며 그것도 총 72명이 수감돼 있는 현실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나라로 남아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전원규 병무청 선병국장은 "그 같은 국제사회의 권고나 흐름을 잘 알고 있지만 병역제도는 그 나라의 지정학적 안보 상황이나 전통, 국민 정서 등의 복합적이며 고유한 사정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으로, 일률적으로 서로 비교할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반박했다.
전원규 국장은 "병역거부를 인정해 국내 비무장 복무를 도입하거나 또는 민간대체복무제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는 약 31개국인데 그 중 약 87%인 23개국이 유럽국가"라면서 "유럽국가의 병역거부자 대체복무제 도입에는 역사적 배경이나 탈냉전 이후 안보위협 감소 등의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최운 국방부 인사국장 씨도 "외국의 사례와 우리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면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탈냉전 이후 집단안보체제가 확립돼 직접적이고 심대한 안보위협 요소가 사라졌기 때문에 의무병제에서 지원병제로 병역제도를 전환하고 있으며 독일의 경우 대체복무제 도입은 세계대전을 통해 주변 국가를 침범한 전범국가로서 반성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강조했다.
대만, 대체복무제 인정...현역 복무기간의 1.4배
1997년 유엔 사무총장이 작성토록 한 각국의 양심적 병역거부권 관련 보고서는 징병제의 실시 유무, 양심적 병역거부권의 인정 유무, 대체복무형태의 인정 유무 등의 현황을 담고 있다. 대체복무제를 인정하는 국가는 구제활동, 환자수송, 소방업무, 장애인을 위한 봉사, 환경미화, 농업, 난민보호, 청소년보호센터 근무, 문화유산의 유지 및 보호, 감옥 및 갱생기관 근무 등을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복무 기간은 대개 현역복무기간의 1∼1.4배.
다음은 우리와 유사한 여건에 있는 대만의 대체복무제를 놓고 상반된 태도로 갈렸다.
이석태씨는 대만 방문 결과를 소개하며 "대체복무 신청자가 특별히 증가했다는 지표를 찾을 수 없었고, 또 양심적 병역법을 빙자해서 군복무를 회피하고자 하는 사례도 없었다"면서 "대만 당국은 대체복무제 도입이 군 전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현역보다 11개월 복무기간이 길도록 한 2년 9개월의 대체복무 기간을 7개월 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원규씨는 "대만은 국군정예화에 따른 병역잉여자의 국가적 활용차원에서 2000년부터 대체복무제를 도입했지만 대만이 우리나라와 다른 것은 병역기피 풍조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불교, 도교 신자로서 종교사유로 인한 연간 병역거부 인원수도 수십 명밖에 안 되는 등 우리와 사정이 판이하다"고 반박했다.
이날 양측의 입장 차이는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는 방식에서 과거의 전통적 방법과 원칙을 사회변화에 맞춰 어느 정도까지 유연하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또 '국가안보'라는 개념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자가 갖는 해석의 차이이기도 했다.
이석태씨는 "국가안보를 단순히 무기를 둔 군인의 수가 얼마나 많은가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거나 지난 시대의 기준이다. 국가안보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총체적인 국력의 합계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며 여기에는 국방력 외의 국민소득, 산업, 경제, 사회문화적 환경, 정보화 등이 포함되는데 인권보장도 필수적인 고려 요소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향군인회 연구소 정창인 연구위원은 "헌법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는 모든 국민이 기본적으로 평등하게 형평성 원칙에 맞게 이행이 돼야 한다. 한국은 국가 주권이 위험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권고라도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상황적인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제성호 중앙대 법과대학 교수는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는 소수자의 인권 문제로 바라보기 힘들다"면서 "소수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하고 어떤 기회의 제공을 거부하면 인권침해가 되겠지만 병역거부에 대한 처벌은 그런 경우가 아니며 국민의 의무 이행의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바라볼 문제"라고 주장했다.
반면 홍영일씨는 국민으로서의 '의무'에 대해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도 있지만 국가의 의무도 있는 것이며, 주인인 국민을 모시는 청지기인 국가는 주인이 뭔가 대안적인 요구를 마련할 것을 요구할 때 그것을 수용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의무다. 그런데 주인이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광에 가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이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풀기 위한 전제로서 우리 사회의 합의가 어느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 무조건 구속은 불구속 원칙 위배
자유시민연대 조남현 대변인은 "국민적 합의는 상당수의 국민들이 동의하는 것을 얘기하는데, 양심적 병역거부의 수용은 다수가 동의하는 선까지는 합의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나 이재승 국민대 법대 교수는 "소수자의 문제에 대해서 국민이 어떻게 합의를 볼 수 있겠는가"라면서 "소수자의 문제이기 때문에 100년이 가도 합의를 이끌어 내기가 어려운 문제이며 따라서 국가 권력 차원에서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재승씨는 "여론에 맡기자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얘기와 똑같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청문회에는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 활동가인 임태훈씨가 나와 증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구속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구속이 만연하고 있는데, 특히 병역거부자 같은 경우에는 자기 발로 자기가 병역법을 위반했다고 병무청에 그 사실을 통보하고 해당 경찰서에 출석하는 등, 증거인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데도 무조건 구속하는 것은 불구속 원칙에 대한 위배"라고 주장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양심의 자유'의 내용과 한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수용 수준을 보여 주는 한 시험대가 될 듯하다. 그 시험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더욱 국가인권위의 의견 정리가 필요함을 이날 청문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인권위는 그동안 내부적으로 검토한 내용에다 청문회에서 수렴한 의견을 반영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견해를 정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