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시집 표지
ⓒ 이종암
뭐라 이름 부를까, 이 책은?
-최재목 <잠들지 마라 잊혀져간다>(샘터)

이 책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막연하다. 저자 최재목이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것이니, 그냥 최재목의 책인가? 저자 최재목은 누구인가? 그는 양명학을 전공한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다. 철학서<동아시아의 양명학><나의 유교 읽기><크로스 오버 인문학>등을 펴내기도 했다.

또한 <나는 폐차가 되고 싶다><길은 가끔 산으로도 접어든다><가슴에서 뜨거웠다면 모두 희망이다>라는 세 권의 시집을 상재한 시인이기도 하다. 책의 머리말인 '나는 왜 열 자의 시를 쓰는가?'를 보면 이 책은 시집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열 자로 된 시의 묶음, 한 편이 열 자로 된 시 100편으로 묶여진 게 이 책의 기본 틀인데, 여기에 책의 중간 중간에 저자가 직접 그린 31편의 그림과 각 시에 100자 이내의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한 줄로 표현하는 일본의 하이쿠보다 더 짧은 열 자로 된 시집, 아마도 이런 시집은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이 시집의 첫 작품 「유치찬란」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나를 만든 건 저 어린 시절

(누구나 어린 시절이 있다. 유치찬란해도 내 청춘의 본적지는 바로 그 곳. 코 한두 줄기씩 흘려두고 왔을 거다. 지금 내가 그 시절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 시절이 나를 규정한다.)

나를 만든 건 코 한두 줄기씩 흘려두고 온, 내 청춘의 본적지인 저 어린 시절이라 명명(命名)할 수 있는 자는 분명 시를 쓰는 철학자, 철학하는 시인이어야만 할 것 같다. 언어를 제재로 우리들 인생살이(삶)의 참 모습을 함축해서 그려내거나, 상처의 삶을 위무하고 새 길을 찾아가는 데서 시(詩)와 철학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이 유사성은 시와 노래, 시와 그림보다 어쩌면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멀고도 낯선 수평선 너머

(수학여행 때 처음 바닷가를 가봤다. 경이로운 수평선 앞에 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산속엔 없었던 그 풍광. 그때 그만 그 멀고도 낯선 선을 따라 넘어갔다. 내 생애 그토록 따스했던 순간-「5. 선을 넘다」)

살갗은 바깥을 잡는 그물

(피부가 닿는 허공에 난 늘 몸을 허락한다. 보이지 않게 날 가져가는 저 바깥. 살갗은 부지런히 왕래하며 우주를 사냥해 온다. 그 그물에 잡힌 하늘과 땅과 사람. 이미 서로 내 것이 아닌 나.-「23. 몸」)

밑도 끝도 없다 물어봐도

(태어나는 것은 세상에 끝없이 물음을 던지는 일. 그래도 답답하다. 답답해서 묻는다. 물을 수록 더 답답해질 뿐. 그냥 끝없이 묻다가 가는 것이다. 그래도 삶은 물을수록 아름답다-「71. 물음」)

늘 몸은 우주와 입맞춘다

(아플 때마다 난 내 몸 어딘가에 이미 경고등이 켜져 있었음을 안다. 병(病)은 그걸 무시하고 달리다 당한 강제정지. 왜 하늘은 말이 없다 하는가. 난 외면해도 우주는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돌보는데.-「84. 경고등」)

우리는 「5. 선을 넘다」의 '멀고도 낯선 수평선 너머'에서는 장차 철학자가 될 청년의 굳센 의지를 읽고, 「23. 몸」'살갗은 바깥을 잡는 그물',「71. 물음」'밑도 끝도 없다 물어봐도',「84. 경고등」'늘 몸은 우주와 입맞춘다'에서는 삶의 본원적인 질문을 얻는다. 또 「90. 현대인」'닦달하다 안 되면 바꾸는'에서는 우리 현대인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한다.

이처럼 이 책은 10字의 시(詩)와 100字의 철학적인 산문의 결합으로 우리에게 '시(詩)' 이상의 것을, '철학(哲學)' 이상의 것을 전해준다. 그렇다. 이 글을 누군가가 읽어 "풀어진 마음을 다잡고 때론 긴장된 마음 느긋하게 풀며, 좋은 화두를 얻어 삶의 진진하고도 따스한 부분을 스스로 열어갈 수 있다면" 10字의 시(詩)는 더 이상 10字가 아니다.

'걸어다님이 상상하는 힘' '길, 시공간이 머문 흔적' '외로워졌다면 어른이다' '하늘에 못질해 둔 환한 눈' '잃는다는 건 또 다른 만남' '몸과 마음엔 다리가 없다'등의 가편(佳篇)들은 우리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철학시(哲學詩)다. 열 자의 시로 그린 따스한 영혼의 풍경 <잠들지 마라 잊혀져간다> 한 권만 있으면 이 추운 겨울도 쉽게 지날 수 있겠다.

잠들지 마라 잊혀져간다 - 열 자의 시로 그린 따스한 영혼의 풍경

최재목 지음, 샘터사(200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