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어떻게 했어요?"
총대를 했던 선배와 통화하면서 고민은 커져갔다. 지난 해는 저녁을 뷔페에서 먹고 그 다음 술집까지 학생들이 부담했다고 한다. 총대는 먼저 참석 가능 인원을 파악한 다음 예산을 잡고 교수에게 줄 선물을 준비한다.
식당과 술집을 알아보고 회비는 그날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좀 적게 내는 식으로 거두면 된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회비 모으는 일이 가장 힘들다며 선배는 '빚쟁이' 같은 강한 끈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올해는 졸업 예정인 학생 수도 적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건 무리다. 그리고 갈수록 대학 사은회는 축소되거나 없어지는 분위기였다.
취업한 학생들이 대거 참석했던 과거에는 교수들에게 양복 한 벌씩 돌리고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끄떡없는 여유가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다르다. 경기가 어렵고 대부분 취업을 못한 상황에서 사은회 때문에 부모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이다. 또 4학년 대표가 뽑히지 않아 행사를 못하는 과들도 많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교수들이 직접 학생들을 위해 마지막 강의와 식사를 준비하는 '역 사은회'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교수에게 갑자기 이런 '좋은 사례'가 있다고 눈치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취직도 안했는데 밥 먹다 얹힐라
졸업 예정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학생1 "다들 교수마다 편지 한 통씩 쓰고, 학과 성격에 맞는 창작물을 하나 만들면 좋겠지만 가뜩이나 각자 인생이 바쁜 4학년들이 그럴 수 있을 지 걱정이다."
학생2 "차라리 그냥 선물만 주고 말자. 밥 먹으면서 교수들이랑 무슨 할 얘기가 있겠어? 미취업자들이 대부분이니까 취업 준비는 잘 하고 있냐, 앞으로 뭐 할거냐고 물을텐데 밥이 잘도 넘어가겠다."
학생3 "그래도 교수들은 마지막이라 담소라도 나누고 싶을 텐데 매년 하던 행사를 별안간 안한다고 해 버리면 무척 섭섭해 할지도 몰라."
학생4 "우리가 무슨 교수들과 악연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지금 성적 처리 기간이 낀 것도 조금 신경쓰여."
학생5 "강의실 하나 빌려서 간단하게 다과회 정도로 끝내기도 한다는데, 그러면 너무 조촐하려나?"
다과회? 언뜻 학교 앞 전통찻집이 떠올랐고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얹힐 수(?) 있는 밥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저녁을 먹지 않으니 회비를 줄일 수도 있다. 오후라 출출할 수도 있으니까 떡도 조금 준비하고 작은 선물에다가 크리스마스 카드까지 더하기로 했다.
나중에 분위기만 좋으면 저녁부터는 '역 사은회'를 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찻집을 2∼3시간 정도 빌리기로 하고 교수와 시간을 맞추기 위해 연구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교수는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 주었다.
"뭘 그렇게 많은 걸 하려고 오후부터 2시간 넘게 잡았어?"
"(약간 어리둥절해 하며) 네? 하하하. 그건 비밀입니다."
OO 교수님의 고향은? 논문 주제는?
비밀은 무슨, 아뿔사! 내용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멍석만 깔아 준다고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교수의 식상한 질문과 우리의 괴로운 답변이 연출되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내용'이 있어야 한다. 뭐가 있을까? 뭐가 좋을까?
학생6 "교수 흉내내기 대회는 어떨까? 난 잘할 자신 있는데!"
학생7 "학과 생활하면서 각자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얘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애."
학생8 "그날만 특별히 교수들 별명을 부르는 것도 재밌겠다. 깐돌이 교수님!(웃음)"
학생9 "학과, 교수와 관련된 문제를 내는 거야. 많이 맞춘 사람에게 상도 주고. 어때?"
결국 '사은회 퀴즈대회'로 낙찰됐다. 총대인 나는 교수의 고향에서부터 논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를 출제했고 어려운 문제는 교수가 즉석에서 힌트를 주었다. 내가 준비했던 해설에 교수들은 더 재밌는 이야기로 양념을 쳤고 중간중간 '돌발 문제'도 생기면서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하게 무르익었다.
자연스럽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도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처럼 수업 시간에 남자친구로부터 예상치 못한 꽃다발을 받았던 학생은 벌써 내년에 결혼을 한다는 얘기, 과제 발표 대신 덜컥 동기에게 고백한 학생에게 교수가 F를 줘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했다는 얘기 등에서 탄성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교수에게 지역 중소기업에서 만든 작은 선물을 전달했고, 학생들에게도 회비의 일부를 돌려 주고싶어 경품 추첨을 통해 문화상품권을 나누어 주었다.
사은회가 아쉽게 끝나고 남은 떡을 불쌍하게 주섬주섬 주워먹으며 정리하고 있을 때 교수가 말했다.
"자, 떡은 그만 먹고 다들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네∼ 교수님∼♡. 히히"
학생10 "(속삭이며) 그럼 이제 우리 계획(역 사은회)대로 된 거야?"
총대 "(더욱 속삭이며) 두말하면 잔소리지(웃음)."
사은회는 무사히 끝냈지만…
이후 일정은 교수의 지원으로 '역 사은회'가 되어 순조롭게 우리 계획대로 진행됐다. 사은회는 무사히 끝났지만 참여 자체를 거부한 학생들 생각에 기분이 찝찝했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이 4년 동안 배운 교수님과 할 게 뭐가 있겠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학생과 교수 사이는 예전에 비해 소원해졌다.
4년 동안 얼굴을 마주해도 우리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 감사할 만큼, 소위 사제간의 정이라는 게 있었나 생각해 본다. 몇몇 학생들은 교수를 단순히 학점 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학점이 잘 나오지 않으면 따로 찾아가 면담을 하는 것 정도가 요즘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 교수와 개인적인 교감(?)을 하는 순간이 아닐까 한다. 물론, 여기에는 어려운 취업 때문에 예전과는 달리 싸늘하고 엄혹한 대학 공기도 한몫 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선배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사은회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취업이든 학문이든 대학 4년을 마무리하면서 스승과 제자가 만나 이야기꽃을 피울 그 언젠가를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