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표소 아줌마와도 친해져 그냥 인사만 하고 들어가기도 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한 때 실상사를 내 집 드나들 듯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았던 돌장승 할아버지가 바로 실상사에 있었다. 지금 4기 중에 3기가 남아 있는데 표정들이 다 다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상원주장군은 부릅뜬 눈이며 주먹코에 수염까지 익살스럽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있는 장승할아버지는 느티나무 아래 서 있는데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장승들은 이정표 구실을 하거나 액이나 잡귀들을 물리치기 위해 절이나 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것인데 실상사 장승들을 보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지 않을까 싶다.
실상사(實相寺)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최초 가람이다. 창건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3)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은 실상사에서 귀농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귀농을 꿈꾸며 여기서 수학하기도 한다.
지난 초파일 이후에 오랜만에 들른 절은 이른 아침이라 보살님들이 밤새 날아온 흙먼지며 낙엽들을 쓸기에 분주했다. 하지만 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여유가 느껴져 따뜻하게 비추는 해를 따라 해바라기를 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여유도 누려본다.
실상사에 오면 꼭 잊지 말아야할 것을 사람들에게 얘기하는데 바로 실상사 약사전 때문이다. 실상사 약사전에는 주철로 만든 불상이 지리산 천왕봉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기도 하지만 꽃살문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실상사에 처음으로 왔을 때 꽃살문을 본 순간 ‘아~ 이런 문살도 있었구나!’하며 감탄을 했다.
그 전에 문살이 아름다운 내소사도 가보았지만 채색된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처음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실상사 약사전 꽃살문을 계기로 예쁜 꽃살문만 보이면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 버릇이 생겼다. 그 덕에 지금은 꽃살문 사진만 꽤 된다. 지난 봄인가 친구에게서 관조스님의 꽃살문 사진집을 선물로 받았는데 나 역시 그런 사진집을 꼭 한 번 내보고 싶은 욕심을 내고 있다.
실상사는 경내에 있는 유물들 즉 석등과 탑 주위의 볼품없는 철제 울타리를 걷어내고 탑과 잘 어울리는 돌 울타리를 만들었다. 항상 절에 가면 느끼는 것이지만 볼썽사나운 울타리들이 미관을 해치는데 실상사는 철제 울타리를 없앤 뒤로는 자연스러운 맛이 살아나 다시 오고 싶게 만든다. 정말로 잘한 일이다.
실상사 경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알싸한 겨울기운이 느껴진다. 겨울이 추워서 싫다는 사람이 많지만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이 알싸한 기분이 너무 좋다. 아침이어서 절 저쪽에 있는 비석들에는 아직 서리가 채 녹지 않아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나서서인지 따뜻한 차 한 잔이 생각나 실상사 안에 있는 찻집 '뜰 앞의 잣나무'에 잠시 들렀다. 따뜻한 매실차 한 잔으로 싸늘한 겨울 기운을 잠시 잊어본다.
이제 실상사에서 나와 백장암으로 방향을 돌렸다. 처음 가 보는 백장암은 의외로 높은 곳에 있었다. 쌓인 눈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암자 입구에 있는 부도에는 아직 눈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암자 앞에 휑하니 있는 부도가 이 추위에 떨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쓰럽기까지 하다. 독특한 곳에 있는 부도였다.
암자로 오르니 스님들은 지금 공양 중인지 방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바깥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털신들이 따스한 햇살아래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곧 스님 한 분이 나오신다. 동안거중에 괜히 방해를 한 것 같아 죄송스런 마음에 빨리 발길을 돌려야했다.
이제 방향을 돌려 함양 마천 땅을 밟는다. 마천에 오면 항상 들르는 절이 있는데 벽송사(碧松寺)라는 절이다. 벽송사도 근처에 있는 실상사처럼 장승이 유명한데 여기는 돌장승이 아니라 나무로 된 장승이다. 일명 변강쇠 장승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함양땅 마천면이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로 유명한 가루지기타령이 전하는 것에서 연유한다.
장승들은 절 초입에 모셔져 있다. 왼쪽이 금호장군, 오른쪽은 호법대장군인데 금호장군은 산불로 머리가 파손되었다고 한다. 외모를 보면 왜 호법대장군을 변강쇠장승이라 하는지 알 수 있다. 부릅뜬 눈은 금세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이고 뭉뚝한 큰 코는 힘을 뽐내듯 하며 입 주위로 수염도 멋지다.
벽송사는 1950년 전란으로 불탔으나 그 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절 입구에는 전쟁의 아픔을 되새길 수 있는 빨치산 토벌에 관한 자료를 안내표지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벽송사 주위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즐비한데 특히 커다란 참나무에는 기생식물인 겨우살이들이 많이 자라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겨우살이는 나중에 노란색으로 변하는 것에서 황금가지라고도 하는 식물로 약재로 쓰이는데, 몇 년 전 실상사 앞 다산방에서 차로 마신 적이 있어 이미 친근한 식물이기도 하다.
겨우살이는 옛 선조들이 초자연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온 식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귀신을 쫓고, 온갖 병을 고치며, 아이를 낳게 하고, 벼락과 화재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생불사의 능력이 있는 신성한 식물로 여겨왔다. 요즘 겨우살이는 여간해서 보기 힘든데 벽송사에 와서 거의 군락 상태라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을 보니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벽송사에서 나와 서암에 잠깐 들렀는데 여느 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같이 간 친구의 말처럼 마치 중국 무협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여하튼 묘한 느낌의 절이다.
오늘은 절과 암자만 몇 군데를 다녔는데 모처럼 느끼는 겨울 산사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이제 겨울로 들어섰지만 조금만 지나면 얼음이 녹고 따스한 햇살이 비추면 금세 봄은 올 것이다. 내년 봄까지 황금가지는 얼마나 자라있을까.
덧붙이는 글 | * 도로안내
1)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가 만나는 함양 교차로에서 광주 - 남원 방향으로 진행 - 지리산 IC로 나와 인월산내 실상사
2) 호남고속도로 전주IC - 전주시 - 17번 국도 이용 - 남원 - 운봉 방향 24번 국도- 운봉- 인월-산내면 방향 60번 지방도- 실상사
3) 88올림픽고속도로 - 지리산IC -인월 방향 -산내면 방향 60번 지방도- 실상사
* 현지교통
1)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백무동계곡행 버스 이용(1일 4회 운행)
2) 인월이나 함양에서 마천 또는 백무동행 버스 이용, 실상사 앞에서 하차 / 20-30분 간격
3) 열차는 전라선 남원에서 백무동행 직행버스 이용 / 1일 9회 운행
4) 전주공용버스터미널에서 백무동행 직행버스 5회 운행
5) 대구서부시외버스정류장에서 거창, 함양 경유하여 백무동 가는 직행 3회 운행(07:40, 10:40, 13:30, 3시간 소요)
* 진주방면에서는 생초IC에서 나와 함양 마천행 표지판을 따라 가면 쉽게 갈 수 있다.
* 주변관광지 : 뱀사골계곡. 백무동계곡, 달궁계곡, 백장암, 지리산국립공원
* 백장암은 남원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이정표가 나오고, 벽송사, 서암은마천으로 나와서 오른쪽 안내표지판을 따라 조금만 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