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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철수 화백의 첫 개인전 작품이 담겨있는 화집 <응달에 피는 꽃> 중에서 [탈춤]. 오른쪽에 동명의 제 시를 넣어주셨습니다. (절판된 것이라 분도출판사에 연락하여 복사본을 받았습니다.)
이철수 화백의 첫 개인전 작품이 담겨있는 화집 <응달에 피는 꽃> 중에서 [탈춤]. 오른쪽에 동명의 제 시를 넣어주셨습니다. (절판된 것이라 분도출판사에 연락하여 복사본을 받았습니다.) ⓒ 이철수
사실 <오마이뉴스>를 드나들게 된 건 이철수 화백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끔씩 들러 여러 회 분의 그림을 후루룩 보면 그 뿐, 다른 기사를 열어본 것은 손꼽을 정도였습니다.

30여 년 전, 그러니까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인사동으로 그의 첫 개인전을 보러 갔을 때만 해도, 그는 장판지 위에 검정색 콜타르로 이념을 쏟아놓는 무명의 운동권 화가였고, 저는 스승을 찾아다니는 목마른 청년이었습니다. 동행한 이현주 목사님이 좋은 친구가 되라며 소개시켜주신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도 그의 그림을 쫓아다니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메뉴판에 있는 '기자회원방'이라는 글자가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클릭해 봤는데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아항, 기자회원들만…." 기사 검색 때문에 회원가입은 했던 터라 기자회원으로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들어가 봤죠. 이 방 저 방 기웃거려보니 호기심이 발동하더군요. "어디 낚싯밥을 한번 던져봐?" 그리고는 예전에 요리사이트에서 썼던 글을 옮겨서 올렸습니다. 그것이 7월 22일 아침에 올린 첫 기사 「시장골목 '덕칠이'를 기억하십니까?」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글을 올리고 한두 시간 지났을까, 편집부로부터 "기사로 채택되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올려 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연 기분이 좋았죠. 제 글은 그 날 섹션톱을 거쳐 메인면의 사는 이야기 맛보기 기사로 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처음 올린 글이 이러니 신이 났죠. "그래 한번 써보자"하고 마음먹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낚싯밥을 던진다고 했지만 그 낚싯줄에 딸려간 것은 <오마이뉴스>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시민기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드나드는 사이트에는 '시민기자로 데뷔'했다는 글과 함께 기사의 링크를 달아서 알렸고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흔히 '기자'라고 하면 취재기사를 쓰는 것으로 알지 않습니까? 수필을 써도 기자가 되느냐는 질문에 이런 저런 대답을 했지만 폼이 나야 말이죠.

그래서 '사는이야기' 말고 취재 기사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라는 컴퓨터 전문지의 편집장까지 지냈지만, 기술지의 성격상 취재기사라고 할 만한 것은 경험해보지 못했던 터라 아쉬움도 남아 있었구요.

그래서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재래시장 살리기' 쪽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평생 한번도 써보지 않은 형식을 쓰려고 하니 이게 제대로 되겠습니까?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버벅거릴 뿐이죠. 그래도 그때 중소기업청의 잘못을 지적한 「재래시장이 들러리인가?」가 국정감사장에서 질책 자료로 한 몫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 맛에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글이 안 나올 때는 읽는 게 최고입니다. 공부하는 셈 치고 이것 저것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글, 공감이 가는 글에는 댓글 한마디씩 달았구요.(시민기자 송년모임장에서 보니, 시민기자들이 제 이름은 몰라도 '무우꽃'이라는 별명은 기억하더군요. 그게 다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면서 댓글을 달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탄생에서 소멸까지⑤ 소주」 기사에서였습니다. "우리나라 주당들의 입을 광복시켜주시옵쏘서~~!!"라는 댓글이 달렸는데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밑에 찬사를 썼습니다. "역시 오마이는 기사도 기사지만 댓글이…"라고 쓰는 순간,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댓글게릴라본부의 꿈은 3일천하로 끝나고 ... 댓글기자 게시판(?)에서 사용했던 짝퉁 로고입니다.
댓글게릴라본부의 꿈은 3일천하로 끝나고 ... 댓글기자 게시판(?)에서 사용했던 짝퉁 로고입니다. ⓒ 자료그림
그리고 나서 한 시간만에 후루룩 쓴 것이 「나는야~ '댓글기자'가 되련다」입니다. 댓글에 가치를 두자는 생각을 장난기 섞어 썼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즐거워하며 동조해 주셨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김에 "이 곳을 댓글기자 커뮤니티 <오마이댓글>로 사용하겠습니다. 즐겨찾기 만들어 놓으시구요…" 했지만 삼일천하였습니다. 반란을 꿈꿨지만 결국은 "며칠간이나마 즐거운 상상에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즐댓"이라는 인사로 '댓글게릴라본부'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 후에 쓴 「식약청, 매뉴얼 말고 사과문 게재해야」는, 쓰면서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지금까지 쓴 10개 남짓의 기사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기사입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취재성 기사를 써보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버벅거렸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달려든 것이 그 기사입니다.

이번에는 꼭 체질 개선을 해야 했습니다. 꼬박 이틀 걸려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편집부에서는 너무 길다며 2/3로 자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꼭 넣어야 할 것과 빼도 좋을 것을 따져 보고…. 아무튼 글을 쓰면서 그렇게 난리를 피운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사를 마친 후에는 자신이 붙었습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어떤 형식도 쓸 수 있어."

어머니 얘기를 쓴 「평생 사랑의 시를 써 바쳐도 모자랄 '울어멍'」과 제 젊은 시절의 상처인 「산 채로 묻힐래, 새 역사에 동참할래?」를 통해서도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글쓰기는 '자신 토해놓기'라고 하더군요. 토하면서 눈물도 흘렸지만 가슴이 후련해짐을 느꼈습니다.

올 한 해가 제게 밝은 한 해는 아니었습니다. 하려던 일이 된 것도 없고 지금도 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를 만나서 많이 즐거웠습니다. 10개 남짓의 기사를 통해 2만5천명의 독자를 만났고 250개 남짓의 댓글을 통해 더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시민기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는 것과,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내년을 살아갈 힘이 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시민기자 여러분, 올 한 해 정말 고마웠습니다. 밝은 새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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