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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템플 기사단> 1권 책표지.
<최후의 템플 기사단> 1권 책표지. ⓒ 김영사
단순한 <다빈치 코드>의 아류가 아님을 직감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소설은 뉴욕의 커다란 박물관에 말을 탄 기사들이 등장하는 장면과 주인공인 테스가 아이와 함께 박물관에 들어서는 장면, 이어 FBI 요원인 라일리가 사건수사를 시작하는 장면, 같은 시간대에 교황청에서 일어나는 회의 장면이 각각 한 장씩을 이루며 시작된다.

소설을 이루어갈 핵심 인물들이 각각 다른 곳에서 어떤 계기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지 간결한 어조로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 마치 영화의 첫 장면을 보는 듯 하다. 잠깐 책장의 맨 앞에 붙어 있는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니 역시나, 이 작품은 원래 시나리오였단다.

각 등장인물이 어떤 사연으로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그들이 이 극에서 가지는 중요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책의 1권이 끝나 있다. 극전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이것은 만들어낸 가짜 이야기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 자연스러움에 혀를 내두를 쯤이면 이미 작품의 반이 끝나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 전개 능력이다.

댄 브라운식 스릴러, 콘웰식 심리 묘사

이 작가는 전반적으로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과 <스카페타 시리즈>로 유명해진 퍼트리샤 콘웰을 반씩 섞어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오랜 권위를 가진 가톨릭의 교리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역사 스릴러라는 면에서 전자와 닮았다면 등장인물 개인의 내면풍경에 심리학적 색채를 입혀 그려놓았다는 면에서 후자를 닮았다.

그러나 댄 브라운에 비해서는 문체가 더 간결하고 분위기에 과장이 없다. 퍼트리샤 콘웰에 비해서는 심리묘사가 좀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독자를 숨도 쉬지 못하게 끝까지 박진감있게 끌어가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에서는 이 작가, 레이먼드 커리가 압도적이다.

잘 읽히는 탓에 이 작가가 보내는 메시지도 굉장히 솔깃하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그리스도교도, 유대인, 이슬람교도가 자신의 종교가 모두 아브라함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하네. 그는 세 종교의 창설자이자 유일신을 세웠어. 모순된 이야기 같지만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인간들 사이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보냈어. 그는 인간이 각기 언어나 문화가 달라도 모든 창조를 지탱하는 유일한 하느님 앞에서 인간 가족이라는 하나에 속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 그런데 그 고귀한 메시지가 왜곡된 거야...

...아랍인과 유대인은 아직도 서로를 죽이고 있어. 지구상에서 가장 뜨겁게 주장되는 땅 때문이지. 아브라함이 거기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 작은 동굴에는 각 종파마다 개별적으로 들여다보는 구역이 따로 있어. 만약 그가 실존한 인물이었다면 후손들이 편협한 마음으로 싸움질이나 한다는 생각만 해도 무덤에서 돌아누울 거야....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떨어져 나온 종교이고 이슬람교는 그러한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온 종교이다. 마치 기독교내의 신교가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온 종교인 것처럼. 또한 기독교 교리와 이슬람 교리 곳곳에서는 불교의 교리와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량 발견된다고 한다.

결국 이 모든 종교의 근원은 하나라는 것. 같은 신을 믿으며 그 방법을 달리 하고 있을 뿐인데 그 방법의 상이함 때문에 인류가 '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고 싸우는 치욕스런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빈치 코드>보다 더 인간적인...

이 작품에 <다빈치 코드>보다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건 이 작가가 기독교 교리가 근본부터 흔들리면 그 여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과 허망함을 심어줄 것인지, 그로 인해 인류가 얼마나 큰 불행을 겪게 될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까지 텍스트에 포함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지구상에는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는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파렴치한 짓을 자행하는 자들도 있지만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이타적인 정신을 실천하며 인류의 역사에 아름다운 빛을 비추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이 자신이 인생을 걸고 실천해온 많은 것들의 출발점이 한낱 지어낸 이야기임을 알았을 때 이들이 맞게 될 공허함과 절망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단 말인가.

...교회는 단점이 많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생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백만이 신앙에 의지해서 매일 살아가고 있어요. 종교는 여전히 안식처를 제공합니다. 그들이 죄를 범했다 하더라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궁극적으로 신앙은 우리가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그 무언가를 제공합니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 죽음 너머에 있을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극복하도록 도와줍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수백만의 영혼은 그저 허공을 떠다닐 겁니다. 명심하세요, 라일리 요원. 그것이 이 세상에 폭로되는 순간부터 이 세계는 최악의 절망과 환멸의 상태로 빠져들 겁니다...

추기경의 입에서 가톨릭의 출발 자체의 비밀을 인정하는 이 말이 나올 때, 그리고 자신이 그 비밀을 인정하면서도 일반에 공개되는 것을 철저히 막는 이유를 말하는 때만 해도 작가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독자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결국 이 비밀은 온 세상에 알려질 것인가? 아니면 추기경의 염려와 같은 이유에서 결국 다시 봉인될 것인가? 작가의 선택은 의외이다.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들에게도, 그들과 같은 수백만에게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사본을 발견한 이후 매일 밤낮으로 그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지난 며칠간 만났던 모든 사람들, 그녀에게 아낌없이 친절과 사랑을 베푼 사람들. 이건 그들에 대한 문제였다. 그들 모두, 그리고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것은 그들의 삶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


작가는 가톨릭 교단의 최상부에 있는 추기경의 입을 통해서보다는, 누구보다도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했던 한 끈질긴 고고학자의 입을 통해서 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고고학자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생활에서 그녀가 만난 평범한 이웃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이 소설이 왜 <다빈치 코드>보다 더 인간적인지를 설명해준다. 추리 문학과 순수문학을 접목시켰다는 평을 받는 퍼트리샤 콘웰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역시 역사 스릴러물. 작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걸 단번에 뒤집어버린다. 마지막 장면을 읽고 나면 독자는 자신을 깊게 짓누르는 것 같던 커다란 의문에서 풀려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한번 작품을 툭 치는 것으로 작가는 독자들의 마음에, 그리고 오랜 세월 인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기독교라는 종교에 작품 내내 불어넣었던 무거운 기운을 덜어주려 한 것이다. 하하, 이건 픽션이라구요. 어차피 지어낸 얘기라니깐요.

하지만 영리한 독자라면 금세 눈치 챌 것이다. 이 영악한 작가가 자신이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이미 충분히 던졌다는 것을. 이것이 아무리 허구라고 해도 독자의 가슴에 한 번 던져진 질문은 두고두고 메아리로 울려 퍼질 것이다.

성경은 누가 쓴 것인가? 성경이 사실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 사후 40년 후에나 쓰여진 성경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실을 담을 수 있었을까? 성경은 왜 이천년 동안이나 절대교리로 군림해 왔는가?


덧붙이는 글 | [참고서적] 댄 브라운 <다빈치 코드>
송대방 <헤르메스의 기둥>


다빈치 코드 1 - 개정판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문학수첩(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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