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라트비아 역사상 최초의 동성애자 거리축제가 무산된 이후 라트비아 최대 보수정당인 제1정당은 "위험일로를 겪고 있는 라트비아의 가족 제도를 보호하기 위해 동성애자들의 결혼불가 조항을 헌법상에 제시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출산율 저하 등 줄어드는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성 간 결혼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제1정당의 의견에 인구감소의 실질적 원인으로 지적돼 온 젊은이들의 해외 이주, 출산 기피, 자살 증가 등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오히려 라트비아 내에서 동성결혼을 한 사례는 극히 미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트비아 헌법 개정은 우리나라 같이 국민투표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의회 내에서 세 번의 회의를 거쳐 통과한 뒤 대통령의 인가를 받으면 효력이 발생한다.
제1정당의 위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라트비아 여론은 이미 민법상에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불허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으므로 헌법에까지 지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반대했으나, 세 번에 걸친 회의 끝에 12월 14일, 라트비아 의회는 전체 의원 100명 중 65명의 찬성표를 얻어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원천봉쇄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일주일 뒤 바이라 비체-프레이베르가(Vaira Viķe-Freiberga) 대통령의 인가를 받아 발효됐다.
찬성의원들은 "라트비아 헌법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은 위법'이라고 명백히 규정한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는 정의를 삽입한 것이므로 이것을 동성애자들에 대한 반감의 표시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최초에 이 안이 제시될 당시 동성애자들로부터 라트비아를 지켜내자는 의도를 명백히 드러낸 바 있고, 이 움직임을 주도한 교통부장관이 공공장소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사견을 많이 피력한 점 등에 비춰 설득력을 얻고 있지 못한 상태다.
정치권, 동성애자 차별로 보수표 끌어들이기
라트비아 언론매체들은 오래 전부터 이런 동성애자 차별법안이 동성애자들을 도구로 해 2006년 선거에서 보수정당으로 표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라고 분석해왔다. 라트비아 민법 35조 2항에 엄연히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으므로 이를 헌법에 집어넣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데도 정치적 목적으로 헌법조항을 수정했다는 것.
DELFI 같은 라트비아 뉴스 포털이나 <발틱 타임스(Baltic Times)> 등 지역매체들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라트비아 정치권의 동성애 혐오증에 대한 염려를 내비쳤다. DELFI는 12월 18일자에서 "개정안 인준 당시 라트비아 의회 내에는 격심한 동성애 혐오증이 만연했으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가정의 가치'를 파괴하는 적대세력으로 몰릴까 두려워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실제 헌법 개정안 통과 후 라트비아 제1정당의 야니스 스미츠 의원은 "입법 관계자들 중에서 그러한(동성애자)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의원들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또 한 의원은 의견 발의 시 '동성애자'라는 단어 대신 '질스(zils)'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라트비아말로 '파랗다'는 의미 외에 포르노그래피를 빗대 동성애자 비하 단어로도 쓰인다. 그 외에도 <발틱 타임스>에 따르면, 반대표를 던진 여섯 명의 의원의 이름이 발표될 때 의회 내에서는 그들을 조소하는 소리까지 터져 나왔다.
바이라 비체-프레이베르 라트비아 대통령은 12월 21일 대통령궁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성명서에서 정치권의 이러한 동성애 차별 움직임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결국 헌법개정안에 서명했다.
"이미 민법상으로 명백히 동성 간 결혼 금지 사항이 있으므로, 헌법개정은 좋든 나쁘든 아무런 변화를 가져 올 수 없음이 분명하다. 분명 자신들이 바라는 바가 정치적으로 공고화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헌법 개정 문제를 논의했고 그래서 다수의 의결을 통해 헌법개정의 결론에 이르렀겠지만, 언젠가 미래에 이런 비슷한 논리로 다수의 의결을 통해 헌법을 또다시 개정하지 않는다는 법이 없으므로, 이런 바탕에서 이 사태의 지속적인 공고화 역시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근친상간을 금하는 조항 같은, 헌법에는 다루고 있지 않으나 민법상으로도 충분한 사항들이 충분히 많이 있다."
라트비아 성적소수자들 서명운동 "나는 차별에 반대한다"
세계게이레즈비언협회 ILGA는 12월 15일 공식 성명서를 통해 "유럽연합 회원국인 라트비아는 유럽연합 회원국들 다수가 서명한 평등과 차별금지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에 역행하여 나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며 "라트비아는 동성애 혐오증에 의한 차별적 헌법 개정 외에도 EU 고용평등위원회에서 요구하는 직장 내 성취향으로 인한 차별금지법안을 발효시키지 않은 유럽연합 내 유일한 국가다"라고 비판했다.
ILGA 유럽사무총장인 유리스 라우리코우스는 기자와 가진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가 분명 유럽연합의 기본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국제법이나 유럽연합법은 한 나라의 헌법이 결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며 "그러나 헌법 개정의 근본원인이 분명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을 염두에 두고 있으므로 향후 유럽연합에서 심각하게 검토돼야할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한국성적소수자 문화인권센터의 한채윤 대표는 "보수화는 여러 곳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도 동성애자들을 겨냥한 포드자동차 광고에 미국가족협회가 불매운동으로 압력을 가하자 포드가 잠시 굴복해 광고철회를 했다가 다시 번복한 사건이 있었다"며 "동성애혐오와 억압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이고 분명한 태도로, 그리고 '가족유지'의 명분을 내걸고 집요한 반대를 보이는 건 새롭게 보이는 추세다"라고 진단했다.
현재 라트비아의 성적소수자 관련협회와 진보단체들은 동성애자들의 차별을 명시하는 개정안에 반대하여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http://pret.diskriminaciju.esmu.es/ ('나는 차별을 반대한다’라는 의미의 라트비아어) 사이트를 통해 이 헌법개정의 부당함을 알리고 반대서명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12년 28일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2100명이 서명한 상태이다.
라트비아의 이런 상황은 지난해 12월 19일 시민동반자법 발효로 동성간 결합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영국과 상반되는 현상으로 부각되면서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현재 유럽에서는 안도라, 오스트리아, 벨기에, 크로아티아, 체코,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헝가리, 아이슬란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슬로베니아,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와 영국이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리히텐슈타인과 아일랜드에서도 법적인정에 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유럽연합에서 헌법상으로 동성결혼이 금지된 국가는 폴란드에 이어 라트비아가 두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