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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1 장 막상막하(莫上莫下)

“지금이 적기네. 대군(大君)은 어찌 생각하는가?”

장철궁은 큰 눈을 뒤룩거리며 옆에 서 있는 대군을 보았다. 적발(赤髮)에 자색의 피부를 가진 대군은 장철궁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뒤룩거리는 장철궁의 눈을 주시했다. 자신도 지금이 호기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장철궁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저들을 보시오.”

그들은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망루가 있는 전각에 서 있었다. 장철궁의 옆으로 운령과 당새아가 있었고 네 사람의 시선은 제마척사맹이 있는 저 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마척사맹이 있는 곳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곳곳에 병장기를 든 군웅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저들 역시 지금은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소. 저들은 반당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겠지만 바싹 긴장해 있을 것이오.”

“허장성세(虛張聲勢)일 수 있어요. 지금 그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우리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운령의 지적이었다. 그녀는 이미 제마척사맹의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대군은 반론을 내밀었다.

“물론 운령소저의 지적이 틀리지는 않소. 하지만 그들은 지금 두려움보다는 반당의 죽음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을 것이오. 분노는 올바른 판단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만 정작 싸움에 있어서는 본래보다 더 큰 위력을 주는 요소이기도 하오.”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운령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럼 자네는 언제 공격하는 것이 적기라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사흘 후 저녁이오. 저들은 지금 분노를 느끼고, 긴장하고 있소. 운령소저의 말대로 저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분노가 그 두려움을 덮고 있는 것이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오. 이틀이 지나면 그들의 마음 속에는 분노가 줄어들면서 그만큼 두려움이 커질 것이오. 더구나 사흘 동안의 긴장은 그들을 지치게 만들 것이고 수마는 그들의 눈꺼풀을 천근의 무게로 누르게 될 것이오.”

누가 들어도 제마척사맹 군웅들의 심리를 간파하고 있는 듯한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물론 반드시 틀렸다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운령은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탄식을 내쉬었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 제마척사맹은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야밤에 불을 환하게 켜 놓은 것은 분명 허장성세였다. 그들은 지금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자…!)

분노는 아마 철혈보의 인물들에게 국한되어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제마척사맹의 수뇌부 정도가 동조하고 있을지 모를 일. 어쩌면 개중에는 철혈보의 신화가 무너진 것에 대해 박수를 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저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반당의 시신으로 인해 충격과 막연한 두려움에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나면 그들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것이었다. 분명 저들 중 누군가가 군웅들의 떨어진 사기를 추켜올리고, 오히려 반당의 죽음을 기화로 맹렬한 분노를 일으키게끔 선동할 터였다.

대군의 생각대로 저들이 이쪽 공격에 대비하느라 사흘 동안 긴장에 빠져있다면 다행이지만 만박거사 구효기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그의 두뇌는 자신도 측정할 수 없는 인물. 어쩌면 그 역시 대군의 생각을 읽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저들이 대군의 생각을 읽고 있다면 사흘 후에는 아무런 이점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격전을 벌여야 한다.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의견을 제시한다면 당장이라도 공격을 하게 될 것이지만 그녀는 참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혼마(魂魔)의 제혼대법(制魂大法)에 의한 마흔 세 명의 실혼인(失魂人)을 앞세워 제마척사맹의 주력이 되는 철혈보를 치고, 아직 불완전하지만 스물 일곱 명의 시검사도를 내세워 좌측의 이진을 공격하게 한 후에, 주력을 내세워 우측으로 가로 질러 휩쓸어 간다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두려움은 무의식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공포는 두려움이 극에 달해 마음에 파고드는 고통이다. 적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시검사도와 실혼인은 저들의 마음 속에 공포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두려움을 가진 상태에서 공포는 극대화되고 피하거나 도망갈 궁리만 할 것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장철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오랜만에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준 장철궁을 보며 대군은 오히려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마음이 변한 것일까? 흐흐흐…. 하지만…. 곡주…. 당신이 죽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우리 구마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공할 힘이 있어. 하지만 그 힘은 당신이 죽은 뒤에나 모습을 보이게 될게야…. 그때까지는 참아주지.)

대군은 내심을 감춘 채 고개를 끄떡였다.

“철저하게 준비하겠소.”

아직은 곡주다. 마음속에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지금은 고개를 숙여야 하는 상대다. 그래보았자 참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운령은 밤바람이 찬지 가늘게 떨고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녀는 끝내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이미 대사형과 세운 계획의 일환이었다. 대사형과 그녀의 적은 제사척사맹 뿐 아니라 저들도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동상이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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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에서 가장 급박한 위기에 몰리고 있는 인물은 백결이었다. 상엽사형제에게 추혼귀견수 하공량이 당한 것도 무리가 아닌 듯 싶었다. 백결은 한 손엔 검을 들고, 왼손으로는 장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공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네 명의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상엽을 비롯한 사형제의 무위에 대해서는 백결 역시 이미 들었던 터였다. 상엽은 이미 최고수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의 형제도 역시 상엽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그들이 펼치는 합공이었다. 신중한 과노인조차도 중원 천지 그 누구라도 그들의 연수합격을 견뎌낼 인물은 존재치 않을 것이라 공언했을 정도였다.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뛰어난 무공을 가진 백결이라 해도 이십여 초가 지나자 견디기 힘들었다. 교묘한 시차의 배합으로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파고드는 네 개의 검날은 잠시도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는 급히 몸을 뒤집으며 자신의 등허리를 파고드는 검날을 피함과 동시에 목을 베어오는 검날을 쳐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단 한번 공격도 못하고 당한다.)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한 명 한 명과 싸운다면 이길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의 연수합격은 너무나 완벽하고 정교해서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이들의 연수합격을 차단하고 그들을 따로 상대할 방법이 절실했다.

더구나 급한 와중에서 담천의나 우교를 보았지만 그들 역시 몸을 빼내어 자신을 도와줄 입장은 안 되는 것 같았다. 다리를 노리고 파고드는 상엽의 검을 피하며 몸을 허공에 띄웠다. 동시에 전면에 날아드는 검날을 쳐내는 순간 백결은 등짝을 훑고 가는 고통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헙…!”

깊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검날이 등을 베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왼손으로 막강한 장력을 뿌리고 상엽을 향해 검을 일직선으로 찔러갔다. 상엽이 거침없이 검을 마주쳐왔다. 하지만 그 순간 백결의 검이 변화를 일으키며 상엽의 왼쪽 어깨를 베어갔다.

상엽의 몸이 급히 우측으로 비스듬히 틀리며 피하자 대신 두 개의 검날이 아직 몸을 허공에 띄우고 있는 백결의 좌우 허리를 노리며 짓쳐 들었다. 더구나 하나의 검날은 미세한 시차를 두며 그의 가슴을 노리며 쏘아오고 있었다. 절대 절명의 위기였다.

“하핫---!”

백결의 입에서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오며 그의 몸이 새우처럼 구부려졌다. 허리를 베어오던 두개의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갔다. 하지만 가슴을 노리던 검날은 그의 어깨를 스치며 선혈을 허공에 흩뿌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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