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적막>
ⓒ 창비
얼마 전까지 전주의 ‘어둡고 습한 모악산 외딴집’에 깃들어 살다가 지금은 ‘따뜻하고 환한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를 했다는 박남준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적막>은 눈 덮인 겨울 들판을 떠올리게 하는 하얀 표지에서부터 외로움의 심사가 간절히 묻어난다.

‘적막’이라는 말에는 ‘고요하고 쓸쓸하다’는 뜻 말고도 ‘의지할 곳 없이 외로움’이라는 뜻이 있다. 박남준의 <적막>이 바로 그렇다. 한편으로는 고요하고 쓸쓸하며, 때로는 의지할 곳 없이 외롭기도 하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을 끓인다 / 문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 처마 끝 풍경 소리, 나 여기 바람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 징징거린다 (‘겨울 풍경’중에서)

눈보라 치는 겨울 날,‘나 여기 바람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 징징거’리는 풍경(風磬)은 사실은 제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호박죽을 끓이는 늙은 사내인 화자 자신의 풍경(風景) 묘사로 와 닿는다. 그도 ‘그대의 품 안 붉은 과녁을 향해 꽂혀 들’(화살나무)어서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 따뜻하게 키우고 싶”(따뜻한 얼음)었다. 그러나 그는‘온몸이 화살이 되었으나 움직일 수 없는 나무’이므로 ‘제 몸의 살을 낱낱이 찢어 / 갈기 세운 채 달려’(화살나무) 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끊임없는 것, 기약하는 것, / 삶이 그럴 것이다 / 아름다운 사람의 사랑도 그럴 것이다 / 내 사랑도 그럴 것이다 / 아니다 나는 틀렸다 (‘첫날밤’ 중에서)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스스로의 사랑은 이제 틀렸다고 말한다. 끊임없는 미래를 기약하는 삶이기보다는 ‘무엇에게인가의 거름이 되어 돌아갈 수 있겠지’(‘겨울 편지를 쓰는 밤’)라고 쓸쓸히 자조하며 그는 ‘툇마루에 앉아 담배 한 대 불을 댕긴다’. 불혹의 얼굴을 궁금해 하던 시인이 어느새 하늘의 명을 알아듣는 나이(知天命)가 돼 버린 것처럼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 만 것이다.

▲ 박남준 시인
ⓒ 창비
편지를 써야겠다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을 위하여 / 올겨울 길고 긴 편지를 써야겠다 / 내가 나에게 써야겠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어찌 / 세상의 그리운 것들에게 떳떳할 수 있겠는가 / 뉘우침의 편지를 그리움의 편지를 쓰는 그 겨울밤 / 밤새 세상을 하얗게 눈은 / 흰 눈은 내릴 것이다 그 눈길 위에 첫발자국을 새기며 걸어 / 편지를 전하러 갈 것이다 그 발자국을 따라 그리운 것들이 /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 것이다 (‘겨울 편지를 쓰는 밤’중에서)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세상의 그리운 것들에게 떳떳하기 위해 시인은 편지를 쓰기로 한다. 그리고 편지를 전하러 가는 ‘그 발자국을 따라 그리운 것들이 /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기를 기다린다. 그리움과 기다림이 한 몸으로‘단단한 무늬’(‘각’)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을 위하여 / 올겨울 길고 긴 편지를 써야겠다 ’는 시인의 다짐은 그래서 아름답고도 눈물겹다.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이름 부르는 일> 전문


결국 시인은 ‘분꽃 향내’가 묻어오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본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호명(呼名)한다는 것은 깃들임이고 그리움이다. 더구나 부르는 그 이름이 애틋하게 그리운 사람이라면“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깃들일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까닭이다.

스스로 간절하게 깃들일 그리움을 호소하는 시인은 지금 외롭다. 그리고 '적막하다'.

<적막>부터 창비시선 제본방식 바뀌었다

박남준의 시집 <적막>을 시작으로 창비 시선의 제본 방식이 바뀌었다.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던 이전의 사철방식을 버리고 다시 접착제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창비 측의 말을 빌리면 “(이전의 제본방식은) 6개월만 지나면 책이 뜯어져서 내구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래서 결국 접착제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앞으로 제본 형태를 보완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크다.

창비 측에서도 인정했듯이 접착제를 쓰는 제본보다는 사철제본이 제작비나 수고가 더 많이 든다. 그래서 초판도 제대로 팔리지 않는 시집의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제본 방식을 바꾼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아쉬움과 서운함이 남는 것이다.

창비 시선의 시집을 사며 사람의 체온이 묻은 결이 고운 비단 보자기를 선물 받은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따뜻해졌던 사람이 비단 기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전의 제본 방식이 못내 그리운 이유이다. / 임정훈

덧붙이는 글 | <적막>, 박남준 시집, 2005년 12월, 창비, 6000원


적막

박남준 지음, 창비(200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