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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열린 채용박람회에서 한 취업준비생이 업체의 채용공고를 살펴보고 있다.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특정한 관련이 없음)
지난해 말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열린 채용박람회에서 한 취업준비생이 업체의 채용공고를 살펴보고 있다.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특정한 관련이 없음) ⓒ 연합뉴스 최재구

대학교수 사이에 우스개가 있다. 성적만 내지 않으면 교수도 할 만하단다. 물론 웃자는 말이다. 하지만 그 우스개엔 오늘의 우울한 대학 현실이 묻어나온다. 학점경쟁이 대학생들의 꼭뒤를 짓누르고 있다. 이른바 '성적 정정기간'이 단면도다. 그 때마다 대다수 교수들이 '문의' 또는 '항의'를 받는다. 더러는 장학금을 타야 할 '집안 사정'을 읍소 받는다.

무엇보다 난감할 때는 수강생 성적이 엇비슷할 때다. A학점(수)과 B학점(우) 비율이 제한되어 있어서다. 모든 수강생들이 강의를 성실하게 들었을 때, A+와 C(미)사이는 미세한 차이일 수밖에 없다. 성적을 내는 데 며칠이 걸리는 까닭이다.

기실 대학 학점의 문제는 하나둘이 아니다. 왜 대학만 '수우미양가'가 아닌 ABCDF로 성적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상대평가제가 젊은 지성인의 영혼을 학점으로 옭아맨다는 데 있다.

젊은 지성인 옭아매는 상대평가 학점제

더러는 사사로운 경험담으로 눈 흘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순히 사적인 문제가 아니기에 쓴다. 2005년 2학기, 네 군데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 가운데 한 대학에서 수강한 학생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학생은 빼어났다. 수강 자세도 성실했다. 발표와 토론까지 뛰어났다. 보고서까지 으뜸이었다. 강단에 서는 보람을 준 젊은이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연말에 받은 젊은 벗의 편지는 큰 충격이었다.

"제게 과분한 A+를 주신 것은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A+가 이렇게 슬프기는 처음입니다(중략). 한편으로, 부끄럽지 않게 F를 부탁드리기 위해 A+를 받으려고 노력한 것도 사실입니다. 낮은 성적 받아놓고선 졸업 평점을 올리기 위해 학점포기를 하는 듯한 인상을 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수님, A+를 F로 정정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저는 원래 이번 학기가 졸업 학기입니다. 취업 걱정을 해야 하는 4학년 마지막 학기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데나 취업원서를 넣고 밀려나듯 졸업하긴 싫었습니다(중략). 그래서 졸업을 일 년 늦추려고 합니다. 다음 한 학기는 휴학하고, 2학기에 9차 학기 학점등록으로 복학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2학기부터 다시 졸업예정자 신분으로 하반기 (취업) 시험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이런 악수를 두는 이유는, 현재 일반 기업체 채용의 대세가 졸업년도 취업자 절대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기업 공채에서 시간이 지난 졸업자는 졸업예정자보다 매우 불리한 것이 요즘입니다."

긴 편지는 이어졌다. "교수님 죄송합니다"는 마지막 말을 읽을 때 가슴이 미어졌다. 기실 대학에서 특히 2학기 강의를 마칠 때마다 콧잔등이 시큰한 경험은 7년 전 처음 강단에 섰을 때부터다. '취업'을 하지 못한 채 졸업하는 젊은이들의 먹먹한 눈길을 마주할 때마다 한없는 무력감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A+학점을 F학점으로 정정해달라는 제자의 편지만큼 쓰라림을 주지는 않았다. 나무라야 옳은가. 고백하거니와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성적을 '정정'했다. 타협이라고 비판해도 좋다. 다만 A+를 F로 정정해 달라는 젊은 지성인의 편지에서 한국사회의 절망스런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우리 모두 읽어야 옳지 않을까.

절망스런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

청년실업과 경쟁이데올로기는 한국 대학생들의 책읽기와 정신적 성숙을 가리틀고 있다. 문제의 편지를 보낸 제자의 다음 말이 없었다면, 성적을 정정하는 데 더 망설였을 터다.

"휴학생으로 지낼 다음 1학기 동안 제 모자란 부분을 채울 겁니다. 우선 책을 많이 읽을 생각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제 식견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루, 혹은 이틀에 한 권씩 읽고 있는데도 지식의 목마름은 갈수록 더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 죽어가는 대학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책을 읽는 지성인들이, 시대의 모순을 인식하는 젊은이들이, 애면글면 이어지는 데 있다. '지식의 목마름'이 더해가는 제자에게, 아니 실업의 굴레에 몸부림치는 모든 '백수와 백조'에게, 새해 연대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래도 당신들이 희망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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