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정정 기간이 시작되는 12월 말.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김 교수는 일어나자마자 전원 버튼을 눌러 휴대폰을 끈다.
성적 처리 결과물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본 그는 '완벽하다' '더 이상의 수정은 없다'며 마음을 다잡은 후에야 다시 휴대폰을 켰다. 예상대로 학생들이 보낸 문자가 울부짖고 있다.
'존경하는 교수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언제쯤 통화 가능할까요? ㅠ.ㅠ'
'교수님∼ 전화를 안 받으셔서 메일 보냈습니다. 꼭 읽어 주세요! ^o^*'
제자들의 문자 메시지가 전혀 반갑지 않은, 바야흐로 성적 정정 기간이다.
학기 말만 되면 휴대폰 켜놓기가 무섭다는 어느 교수는 "전국의 모든 억울한 학생들이 나에게 몰려드는 것 같다"며 "이의 신청 기간이 끝날 때까지 대인기피증 환자가 된 기분마저 든다"고 말했다.
눈물로 읍소까지... 학점전쟁 나선 대학생들
경기가 어려워지고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대학생들에게 두 과목 낙제를 뜻하는 '쌍권총' 같은 말은 더 이상 낭만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교양 강의도 학점이 잘 나오는 전공 관련 과목만 듣고 성적이 나쁜(절대 F나 D를 말하는 게 아니다) 과목은 재수강을 해서라도 학점을 올린다.
졸업 평점 4.0 이상이 목표라는 대학생 정진우(25·신라대)씨는 "요즘 성적 증명서를 받지 않는 기업도 있지만 학점이 성실함을 알 수 있는 기준이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다"며 "면접에서 같은 값이면 학점 좋은 사람이 뽑힐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학기 중에도 대학생들은 높은 학점을 받기 위해 리포트와 발표 등에 신경을 쓰고 중간과 기말시험 때는 도서관에서 밤을 새기도 한다. 하지만 '높은 학점 굳히기' 작업은 시험 그 이후에 시작된다.
교수가 성적을 1차로 고시하면 학생들은 전화와 메일은 기본이고 직접 찾아와서 자신의 학점을 '올려' 줄 것을 요청한다. 예전에는 "졸업을 해야 하니 낙제는 면하게 F를 D로 올려 달라"는 식이었다면 요즘에는 "왜 내가 B+냐, A로 올려 달라"는 요청이 많다.
여기에 장학금을 받으려는 학생들까지 가세해 성적 정정 기간이 되면 교수 연구실 앞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학점을 올리기 위해 교수 앞에서 늘어놓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인간극장' 뺨칠 정도다. 레퍼토리는 보통 이렇다.
교수님! 제가 다른 과목은 전부 A+인데 이 과목만 A를 받았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합니다. 저희 부모님은 시골에서 어렵게 농사를 짓는데 쌀협상 비준안 통과로 이제 살 길이 막막해져 이번에 장학금을 타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습니다. 어린 동생들도 많아 나중에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최고의 성적으로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쯤 되면 교수는 학생의 읍소를 쉽게 외면하지 못한다. 기자가 만난 한 대학생은 "일곱 과목을 전부 A+로 만들기 위해 일곱 번의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다(물론 이것도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제에서 가능한 얘기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교수들을 일일이 찾아갔다는 한 학생도 "조금 과장된 이야기긴 하지만 집안이 어려운 건 사실이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밀려드는 학점 청탁... 교수들은 괴롭다
반면 교수들은 밀려드는 학점 청탁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성적 정정 기간이 늘 괴롭다는 어느 교수는 "F학점을 받은 학생들에게는 간혹 구원의 손길을 보내기도 하지만 무작정 한 단계 높은 성적을 요구하는 학생들은 정말 당혹스럽다"며 "성적 처리 과정에 이상이 없다면 고쳐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간절한 눈물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많다"고 털어 놓았다.
자신의 노모를 통해 부탁을 받았다는 한 교수는 "어머니가 다니는 병원의 담당의사 자녀가 내 수업을 들었는데 성적 때문에 전화가 올 거라는 연락을 어머니께 받은 적도 있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수들도 나름대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대학에서 법학을 강의하고 있는 박윤경씨는 "첫 시간에 아예 성적 정정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할 수 없다고 못 박아 둔다"고 밝혔다. "상대평가는 성적을 고칠 경우 그만큼 다른 학생이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현재 상당수 대학들은 엄격하게 상대평가제를 실시하고 있다.
부산 동아대에서 깐깐하기로 유명한 한 교수는 "학부모에서부터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해도 안되는 건 안된다"며 "그렇게 사정이 어렵다면 더욱 잘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학생에게 반문하는 방식을 쓴다.
같은 대학의 다른 교수는 점수를 어떻게 매겼는지 자세하게 알려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다시 계산해 보고 학생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채점해 보니 A가 아니고 B+이 나오는데 어떻게 할까? 고쳐 줄까?"라며 학생이 먼저 포기하게 한다.
학생들의 학점 이기주의... 도가 지나치다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교수들은 되도록이면 F학점을 받는 학생이 생겨나지 않도록 구제 기회를 주는 등 애쓴다고 밝혔다. 부산의 한 대학에서 강의 중인 한 교수는 "지방대 출신인 데다가 학점까지 나쁘면 취업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염려돼 나름대로 배려를 한다"고 말했다.
졸업과 취업이라는 그 절박한 심정은 이해지만 교수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학생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부산 경성대 김성문 교수는 "사정이 어렵기는 다들 마찬가진데 성적 올려서 자기 때문에 장학금을 못 받게 되는 사람 생각은 전혀 안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또 다른 교수는 "성적에 불만이 있는 일부 학생들은 메일로 '과제는 제대로 확인했느냐?' '점수를 이 정도밖에 주지 않는 이유는 뭐냐?'고 교수의 평가 기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정정을 요구하기도 한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덧붙이는 글 | 김수원 기자는 부산의 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