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어딘지 모르게 귀에 익은 질문이다. 인도 '마더 테레사의 집'의 시인 조병준(46)이 9년 전 자신의 친구들을 우리들에게 인사시키면서 했던 물음이다.
그때 그는 두 출판사에서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라는 같은 제목을 달고, 부제만 '오후 4시의 천사들'(그린비 펴냄)과 '나는 천사를 믿지 않지만'(박가서·장 펴냄)으로 달리해 각각 책을 펴내면서 인도 콜카타(캘커타)의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만난 친구들을 소개했었다.
그 사이 출판사가 문을 닫게 되어 부득불 절판됐던 <나는 천사를 믿지 않지만> 편은 '오후 4시의 천사들'과 합본, 마더 테레사와의 가상 인터뷰를 새로 넣고 컬러 사진을 보강하는 등 새 모습을 하고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오후 4시의 천사들>(그린비 펴냄)로 작년 12월 다시 나타났다.
그런 그가 이번에도 역시 같은 제목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에다 부제를 '이 땅이 아름다운 이유'(수류산방.중심 펴냄)라고 한 새 책을 통해 이 땅에 사는 친구들을 소개한다.
조병준과의 인터뷰는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정초에 인터뷰할 요량으로 전화를 넣었다가 "내일(12월 30일) 어딘가로 떠났다가 10여 일 후에나 온다"며 "지금 당장은 가능하다"고 해서 득달 같이 달려갔다.
책에도 시절인연이 있더라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듯 책의 내일도 정말 모를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절판되어 생명이 끝난 줄 알았던 책이 다시 옛 친구들과 한집살림을 차려 살아나게 되고, 처음 친구 이야기가 두 권으로 나왔듯 이번에도 이 땅의 친구들과 옛 친구들 이야기가 나란히 두 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참 묘하죠?"
조병준은 책 내용보다 책이 출간되던 과정의 얘기를 먼저 꺼내면서 세상 모든 것에는 피고 지는 때가 있듯 '시절인연'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병준은 인스턴트 식품처럼 책도 유통기간을 갖게 된 세상에서 자신의 책이 이렇게 오래 살아남아 주어 고맙다고도 했다.
절판된 그의 또 다른 책 <길에서 만나다>도 조만간 한 출판사에서 새 모습으로 나올 예정이라며, 이렇듯 살면서 다가오는 인연을 따라가면 재미있는 세상이 펼쳐진다고 했다. 조병준은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그래도 비틀거리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은 무엇보다도 친구들이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어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했다.
사소한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
그가 이번에 새로 인사시키는 이 땅의 친구들 이야기 책은 '나는 천사를 믿지 않지만'을 만들었던 편집자가 제안해서 이루어졌다. 그 편집자는 어느 날 함께 술 마시다 나온 이 땅의 친구들 이야기를 글로 써 보라며 연재할 수 있는 잡지 <레몬 트리>까지 섭외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사진가 이한구와 동행하면서 20년이 넘은 친구부터 이제 여섯 달 된 친구까지, 20대 대학생에서 50대 연극 연출가까지, 나이도 직업도 고향도 배경도 모두 다른 열 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의 친구들은 유명한 이들이나 기이한 예술가들 일 거라는 선입관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주유소 주인, 선생님, 의사, 서점 주인, 과수원의 농부, 학생… 모두들 전국 각지 혹은 도시에서, 대개는 시골에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는 평범한 아줌마 아저씨들, 그리고 청년들의 얼굴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조병준은 왜 이들을 우리에게 인사시키려고 할까?
"이들은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치료하고, 나무를 깎고,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농약 안 쓰고 과일을 키우려 하고… 이들은 각각 삶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가장 소박하게, 가장 격렬하게 문명과 자본의 집요함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또 사랑할 줄 알고 나눌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푸른 나무 같고 청량한 바람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에 그 사소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이 정도면 인사시켜 드릴 만하지 않습니까?"
설명이 안 되는 우연, 그건 필연일 수도
조병준의 친구 소개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갔던 1990년의 인도여행에서 비롯됐다. 그때 그는 '샨티니케탄'(콜카타에서 기차로 3시간 남짓 떨어진 곳)을 가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래서 그는 1993년에 시성 타고르의 가족들이 대학을 만들었다는 '평화의 땅'이라는 그곳을 다시 찾아간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 철학과 문학, 음악과 춤,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모이는 이 '코스모폴리탄적 시골 마을'의 게스트하우스엔 그가 묵을 방이 없었고, 수소문 끝에 그곳에서 조각을 공부하던 양종세(새 책 <이 땅이 아름다운 이유>에서 가장 먼저 소개한 화순의 조각가)씨의 집에 묵게 된다.
거기서 무려 보름 동안 공짜 손님으로 개긴 그는 남인도로 갈 기차표를 사러 콜카타로 간다. 하지만 기차가 15분 정도 연착하는 바람에 매표소는 문을 닫고, 하는 수 없이 그는 예전에 들렀던 콜카타의 게스트하우스에 들게 된다.
그곳에서 조병준은 보름 전 자신이 샨티니케탄에 가기 전 보았던 사람들이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들을 따라간 조병준은 마더 테레사의 집을 만나게 된다.
"아까 시절인연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제가 마더 테레사의 집으로 가는 과정을 보면, 종교적 의미의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샨티니케탄에서 방이 없어 양종세를 만났고, 기차가 연착되어 그날 남인도로 바로 가지 못했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우연, 그건 필연이 아닐까. 그래서 '시간의 신'이 있다면 그건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도는 환상적인 곳 절대 아니다!
그는 인도라는 나라는 여러 얼굴을 가졌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이나 요가를 떠올리며 마음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으로들 생각하는데, 그건 착각이라고 잘라 말한다.
"많은 인도 관련 정보들이 실제보다 환상적으로 부풀려졌는데, 인도는 그런 곳이 절대 아닙니다. 인도 사람 모두가 성인이 아닙니다. 인도 사람들은 매우 드세고, 사기꾼도 많고, 관료주의적이고, 무질서하죠.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인도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마음공부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도 어떤 젊은 친구가 마음공부하는 명상 센터 같은 곳을 소개해 달라고 찾아왔단다. 그래서 그는 자신은 차분히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명상이나 요가는 못하지만 '붕대명상'을 한 번 해보라고 권했더니 아무 말 없이 그냥 가버리더란다. 그가 말하는 '붕대명상'이란 환자에게 붕대 감기를 하다 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순전히 그가 개발한(?) 명상법이다.
마더 테레사의 집 간호팀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어느 날 그는 붕대를 감는 일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붕대가 그저 풀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당기면서 강하게만 감았다. 그런데 다음 날 붕대를 풀어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환자의 다리에 붕대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고, 환자는 피가 통하지 않아 생고생을 했던 것. 그래서 이번에는 그걸 의식하면서 좀 느슨하게 감았더니 얼마 안 가 다 풀리더란다.
"나중에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붕대 매듭이 느껴지더군요. 풀리지 않으며 적당히 알맞은 조임으로 말이죠. 그때 저는 붕대 하나라도 제대로 감기 위해서는 집중과 헌신,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렇게 해서 붕대를 제대로 감게 되면 환자와 저에게 평화가 찾아옴을 알았죠. 그게 바로 명상이 아닌가요?"
여행 대신 블로그에 빠져 지내다!
그동안 조병준의 역마살을 붙잡았던 그의 어머니가 지난 해 7월 돌아가셨다. 조병준은 유럽 여행을 한 후 또 하나의 어머니인 '콜카다'가 아닌 다른 도시,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살아볼 요량으로 글품을 열심히 팔아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그래서 그는 마드리드의 꿈을 접고 대신 어머니 병수발과 병원비를 위해 열심히 글품을 팔았다.
그런데 병상에 있던 그의 어머니가 다시 쓰러졌다. 그때 그는 무척 고민했다. 동생들과 상의하고 의사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병원에 간들 다시 깨어날 확률은 없고, 다만 산소 호흡기를 끼우면 자칫 서너 달 고생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때 저는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깨달았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 중에 환자가 편안하게 죽게 하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제 품에서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가시도록 하는 것이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더운 여름 어머니는 제 품에서 일 주일을 편안하게 계시다 가셨습니다."
아버지마저 병환 중이어서 먼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그는 요즘 블로그에 푹 빠져 지낸다. 블로그가 수평적 네트워크여서 너무 좋다고 말하는 그는 그곳에 거의 매일 글을 올린다. 지난해 초부터 시작한 그의 블로그는 어느덧 인기 블로그로 꼽힌다. 온라인을 통해 소통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말하는 그의 블로그엔 언젠가 우리가 또 인사할지도 모를 그의 친구들이 열심히 들락거리고 있었다.
| | 조병준은 누구인가 | | | |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마흔여섯의 총각 조병준은 대학원까지 다니며 신문방송학을 공부했고, 신문사 시험에 토플 점수가 포함되는 것이 못마땅해 토플 시험을 치지도 않고 응시했다가 '당연히' 낙방한 경험의 소유자다.
남들처럼 직장 생활을 하던 그는 반복되는 일상이 싫어 그만두고 1990년 인도를 첫 여행한 이후 서너 번에 걸쳐 1년여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방송 관련한 연구원을 비롯해 광고 프로덕션 조감독, 극단 기획자, 방송 구성 작가, 번역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품을 파는 그를 '글 쓰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게 가장 편할 것 같다. 특히 사람에 관한 글 전문가라고 해도 괜찮을 듯싶다.
서른여덟의 나이에 문화평론서 <나눔 나눔 나눔>을 첫 책으로 낸 조병준은 <길에서 만나다>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나를 미치게 하는 바다>를 쓰고 <유나바머> <영화, 그 비밀의 언어> <나의 피는 꿈속을 가로지르는 강물과 같다>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의 인세는 12%를 받는다고 했다. 첫 번째 2%는 콜카타의 마더 테레사의 집에, 두 번째 2%는 인천과 안산에 있는 마더 테레사의 집에, 세 번째 2%는 외국인노동자단체에, 네 번째 2%는 배고픈 북한 동포들에게, 다섯 번째 2%는 고아원과 불우청소년들에게, 그리고 마지막 2%는 자신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