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월 6일. 당시 복학생이었던 나는 대지극장 앞에서 발걸음을 급히 멈췄다. 가판대에 비치된 스포츠신문들의 충격적인 헤드라인 때문이었다.
'가수 김광석 자살'
순간 머리가 띵해지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 33살에 자살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내 감성의 아이콘(icon)이었던 그는 이렇게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곳으로" 떠나버렸다.
난 그날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셨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난 대취(大醉)해 쓰러졌다. 원망과 그리움을 모두 가슴에 안고….
김광석의 목소리를 만나다
그와 나의 인연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재수생이었던 나는 매일 버스를 타고 홍제동 무악재를 넘나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버스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곡에 귀가 번쩍 트였다. 김창기의 음색이 매혹적인(내겐 정말 그렇다!) 그룹 '동물원'의 '혜화동'이었다.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그룹 동물원의 멜로디와 언어는 단번에 날 사로잡았다. 난 다음날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동물원 1집과 2집(모두 LP판이다)을 한꺼번에 샀다. 거기에서 '거리에서'(1집)를 부르는 슬픈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났다. 김광석이었다.
그는 1집에서 '거리에서'와 '말하지 못한 내 사랑', 2집에서는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와 '새장 속의 친구'를 불렀다. 특히 그와 유준열이 번갈아 가며 부른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내가 길거리를 걸으면서 자주 흥얼거리는 넘버가 됐다.
"가진 것 없는 마음 하나로/ 난 한없이 서 있소/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 바람 속에 서성이고/ 잠들지 않은 꿈 때문일까/ 비 맞은 채로/ 서성이는 마음의/ 날 불러 주오/ 나지막히"
'새벽'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거쳐 '동물원'에 안착한 그는 정말 "가진 것 없는 마음 하나"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잊혀져 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 "나를 유혹하는 안일한 만족"을 떨치고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쓰곤 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1992년 가을. 목소리로만 만났던 그를 불교방송국에서 직접 만났다. 과지(科誌)였던 <나랏말씀>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내가 92학번 후배들과 함께 10집에 실릴 '김광석 인터뷰'를 위해 방송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저녁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심야 가요프로그램(<밤의 창가에서>란 타이틀을 걸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하회탈 같은 웃음을 내보이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노래가 나가는 동안엔 복도로 나와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가 끝날 즈음에 다시 진행을 위해 스튜디오로 돌아가곤 했다.
대학생 기자, 김광석을 직접 만나다
방송은 다음날 새벽 1시가 조금 넘어 끝났고 우리는 인사동으로 향했다. 우리를 태운 그의 차는 아주 작고 소박했다(그가 엉청 뜬 후엔 그랜저를 타고 다녔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 특히 '딴따라'(?)답게 차안엔 두세 벌의 의상(?)이 걸려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인사동 초입에 위치한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대학연합노래모임에서 활동한 이야기며 김민기씨와의 만남, '새벽'과 '노찾사'를 거쳐 '동물원'에 이르는 자신의 음악적 여정을 아주 편안하게 풀어놓았다.
그는 매우 솔직했다.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지도 않았고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의 정신은 지극히 맑아 보였다. 그는 우리에게 "노래가 가지는 힘 또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사회변혁적인 노래를 부르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하는 가수들도 있지. 하지만 나는 내 노래가 다른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변화를 가져오게 할 만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아. 그럴 자신은 없으니까. 노래는 생각할 거리를 주고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그 힘을 다한다고 생각해."
그는 당시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에 모두 접목되는 가수'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 새벽과 노찾사를 거쳐 동물원에 이른 그의 음악적 여정을 고려한 평가였다. 하지만 그는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만약 '좋은 노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좋은 노래란 '사는 이야기, 평범하고 솔직한 이야기이다'라고 대답할 거야. (안)치환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대중성 확보를 위한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됐어. 왜 치환이는 대중성 확보에 미흡한지를 생각했지.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 이유는 일부 사람들의 공감대를 자기의 것으로만 소유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러한 생각은 단지 당파주의, 편파주의를 형성시킬 뿐이야."
그의 '노래철학'은 계속됐다. 그는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들은 부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대중성과 의미있는 노래 사이에서 갈팡질팡해왔다"는 고백도 빠뜨리지 않았다.
"내가 부른 노래들 중에 썩 자신이 없는 노래가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 내 생각이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 생겨. '거리에서' '사랑했지만' '기다려줘' 등이 그런 노래들이지. 이제는 이 노래들이 일반 대중가요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랑이야기라고 해서 결코 무시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이들 노래가 대중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것이고, 다른 의미있는 노래들을 접할 기회도 제공했다는 거야."
가만 보니 그는 애연가(자판기에서 5갑의 담배를 한꺼번에 뽑기도 했다)에 애주가였다. 그의 손에서 담배는 떠나지 않았고, 소주잔은 끝없이 그의 갈증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기운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가 말했던 김민기·정태춘·안치환
그가 김민기와 정태춘과 안치환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을 통해 한국 음악계에서 일가를 이룬 가객(歌客)들이다. 그는 80년대 초반 김민기를 만나 뮤지컬 <개똥이> 음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가 썼던 노래들, 그리고 행적들은 정말 기이하기까지 해. 개인적인 관계에서 보면 좋은 사람이지. 그러나 시대가 만든 사람이라 보기에는 정말 아까운 사람이야. 음악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가 가지는 입장을 넘어선 사람이라고. 시대를 담아내고 아픔을 담아내고 그려내면서도 열려있는 사람이지."
이야기는 정태춘으로 넘어갔다. 그는 "태춘이형은 소박하고 깨끗하다"고 평가하면서도 그에 대한 아쉬운 속내를 털어놓았다.
"순수쪽으로 애쓰다가 갑자기 민중성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폭을 좁히지 않았나 싶어. 민중의 아픔들을 이슈화시켜 운동권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노래가 너무 미지근하다고 느꼈는지 확실치는 않아. 그 이전까지 태춘이형은 섬뜩한 직접적인 표현들을 아주 시적인 언어로서 제대로 걸러서 잘 표현했다고. 그런데 이제 그러한 직접적인 표현들을 하겠다고 하니 그만큼 형의 활동범위는 줄어들었다고 생각해."
가까운 동료였던 안치환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치환이는 80년대 서정적인 운동가요로 출발했어. 크게 보면 70년대 초에 '아침이슬'이 있었다면 80년대에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있다고 생각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바로 치환이의 노래야. 그의 가슴으로 담아낸 노래라고. 하지만 이후 노래들이 그가 느낀 그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는지 궁금해. 대중성을 확보하는 문제에서 애매모호한 입장을 보였다고 생각해."
포장마차 대화는 새벽 5시가 조금 넘어서야 끝이 났다. 새벽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던졌다.
"얼마 전 월간 <말> 기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어. 그때 그 기자가 나에게 던진 질문 중에 '자신은 과연 의미있는 가수라고 생각하는가'라는 게 있었지. 난 그 질문에 '나는 단지 대중 딴따라다'라고 답했어. 난 정말 '잘하는 대중딴따라'이고 싶어. 그 이외에는 어떤 큰 의미도 부여하고 싶지 않아."
그날 나와 후배들은 가슴 속에 '맑은 강' 하나를 품고 새벽을 건넜다.
천상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있을 김광석... "행복하세요"
불교방송국과 인사동에서 그를 만난 지 14년이나 흘렀다. 그리고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벌써 10년이 됐다. 솔직히 나는 그 10년 동안에도 그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의 노래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엔 다섯 살인 딸조차 '사랑했지만'과 '바람이 불어오는 곳' 등 그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마도 그는 지금 천상에서도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며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만 같다. "부르고 또 불러도 아쉬운 노래들"을. 지상에서 '소극장 공연 1000회'라는 전후무후한 기록을 과시라도 하듯 말이다. 그래서 그가 있는 천상은 분명 행복할 게다.
14년 인사동 포장마차 인터뷰를 마치고 내가 그에게 건넨 선물이 있었다. 곽재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전장포 아리랑>이었다. 그도 지금쯤은 누렇게 낡았을 이 시집을 들추고 있을지 모르겠다.
자, 이제 지상의 내가 천상의 그에게 곽재구 시인의 시 한수 올린다. 살아 생전 그가 쭈글쭈글 웃으며 건넨 인사와 함께. "행복하세요"라고.
마음을 바쳐 당신을 기다리던 시절은 행복했습니다. 오지 않는 새벽과 갈 수 없는 나라를 꿈꾸던 밤이 길고 추웠습니다. 천 사람의 저버린 희망과 만 사람의 저버린 추억이 굽이치는 강물 앞에서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당신의 옛모습을 꿈꾸었습니다. 천송이 만송이의 슬픔이 꺾인 후에 우리에게 남는 아름다움이 무엇일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깊은 부끄러움이 끝나기 전에 꼭 와줄 것만 같은 당신의 따뜻한 옷자락을 꿈꾸었습니다.
지고 또 지고 그래도 남은 슬픔이 다 지지 못한 그날에 당신이 처음 약속하셨듯이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산이거나 강이거나 죽음이거나 속삭임이거나 우리들의 부끄러움이 널린 땅이면 그 어디에고 당신의 뜨거운 숨결이 타올랐습니다.
- 진달래꽃, <전장포 아리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