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피카소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알아도 김정희의 세한도, 윤두서의 자화상은 잘 모른다. 그거야 대중의 잘못이 아니고, 우리 교육의 문제일 테지만 우리 그림에 대한 애정은 이 시대에 새롭게 요구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림을 직접 보기는 참 어렵다. 대부분의 명품 그림들이 개인 소장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런 그림들을 보는 행운을 전한다고 한다. 지난 4일부터 8일까지 새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1회화실에서 조선 시대 최고 화가들의 그림, 그것도 개인 소장이어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 기간이 끝나면 이 작품들은 바로 소장가들에게 돌려 준다.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사전에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의 이수미 연구관과 통화를 한 뒤 찾아갔지만 바쁜 그에게 많은 것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전시 작품 중 아주 특별한 작품을 소개 받았다. 그것은 바로 자화상으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학자 윤두서(1668~1715)의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 선생(진단타려도, 陳摶墮驢圖)'인데 여기에도 윤두서의 자화상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림은 난세에 시달리던 중국 선비 진단(호 희이)이 좋은 임금이 나타났다는 깜짝 소식에 기뻐하다가 그만 타고 가던 나귀에서 떨어졌음에도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선비 얼굴은 윤두서 '자화상'에 나오는 바로 그 모습으로 선비는 바로 윤두서 자신이다. 이런 그림의 내력은 전통 그림을 새롭게 조명하여 인기를 끌다 지난해 세상을 뜬 오주석 교수가 일구어냈다.
성군을 갈망하는 선비의 마음을 본 숙종 임금이 화제(畵題, 그림 위에 쓰는 시와 글)를 직접 적었다. 박물관에서 그림에 붙인 설명 중 숙종의 화제를 한 번 보자.
'희이 선생 무슨 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다.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이제부터 온천하에 근심걱정 없으리라.
을미년 8월 상순에 쓰다.'
여기서 나는 바로 이 그림의 나귀에서 떨어진 얼굴과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의 얼굴을 비교해 본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정면을 응시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초상으로 역대 조선의 초상 중에서 획기적인 명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윤두서는 이 자화상을 통해 학문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자신에게 다그쳤을 철저한 엄격성과 불운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꼿꼿하게 지켜나간 선비의 옹골찬 지조를 느낄 수 있다는 평가다.
이 그림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어 있다. 그것은 있어야 할 두 귀, 목과 상체가 없다는 점이다. 탕건 윗부분이 잘려나간 채 화폭 위쪽에 매달린 얼굴이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 대체 어떻게 이런 그림이 나올 수가 있었을까? 이 수수께끼도 고 오주석 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찾아낸 <조선사료집진속>(조선총독부 펴냄)에서 풀어냈다고 한다. 거기엔 놀랍게도 목과 도포를 입은 윗몸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윤두서 자화상의 옛사진이 들어 있다.
오씨는 "윤두서가 버드나무 숯인 유탄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미처 먹으로 윗몸의 선을 그리지 않아 작품이 미완성 상태로 후대에 전해오다 관리소홀로 지워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미숙한 표구상이 구겨진 작품을 펴고 때를 빼는 과정에서 표면을 심하게 문질러 유탄 자국을 지워 버리는 엄청난 사고를 저질렀을 것"으로 짐작했다. 결국, 오씨는 윤두서의 자화상은 미완성이었다는 재미있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윤두서의 그림을 본 다음 나는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추사 김정희의 국보 180호 '세한도(歲寒圖)'를 봤다. 이 그림에 추사는 다음과 같은 논어의 한 구절에서 따온 발문(跋文, 책이나 그림의 끝에 내용의 요지나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붙였다.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의 푸름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세한도'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가 59살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 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가로 놓인 초가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간략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가 지향하는 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는 평가이다.
갈필(渴筆,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빳빳한 털로 만든 붓)로 형태의 대강만을 간추린 듯 그려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용서치 않는 강직한 선비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밖에 눈길을 끄는 작품은 조선 후기의 화가 이인문이 4계절의 대자연 경관을 연이어 그려 가로 길이 8m가 넘는 거대한 그림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조선 중기의 화가 이징이 비단에 금물로 그린 '이금산수도(泥金水山圖)', 개띠 해 병술년에 의미있는 조선 전기의 화가 이암의 '모견도(母犬圖)', 군자다운 매화의 기품을 그대로 드러낸 조선 중기의 화가 어몽룡의 그림 '월매도(月梅圖)' 등이다.
이 전시회에 특별한 것은 또 하나 있다. 그동안 그림의 이름이 모두 어려운 한자로 된 탓에 일반인이 이해하기가 어려워 지난해 5월 31일자 <동아일보> 김영원 칼럼은 "문화재 용어 쉽게 바꾸자"는 주장을 한 적이 있었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적극 호응하여 전시 작품의 이름을 쉬운 말로 바꾸고 뒤에 원래 이름을 덧붙이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예를 들면 '진단타려도(陳摶墮驢圖)'는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 선생'으로,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끝없이 펼쳐진 강산'으로, '모견도(母犬圖)'는 '어미개와 강아지'로, '송하인물도(松下人物圖)'는 '소나무와 선인'으로 해 놓은 것이다.
미술관 1회화실에 들어가면 먼저 초상화실부터 시작되는데 윤두서뿐만 아니라 강세황, 서직수, 김정희 등의 초상화가 있으며, 얼굴의 점과 수염 한올 한올까지 상세하게 사실대로 그려낸 조선 초상화의 진수를 볼 수가 있다. 이어서 산수화, 화조동물화(꽃, 새, 동물), 궁중기록화, 불교회화 순서로 전시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해 12월 25일까지 김정희의 '해인사 중건 상량문'(경상남도 유형문화재 33호)과 탄연의 '청평산 문수원기 비석 조각들'은 미술관 Ⅰ서예실에서 전시를 했다고 한다. 이어서 지난 12월 27일(화)부터 1월 2일까지는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글씨자료인 '흥덕왕릉 비석 조각들'과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명필 강세황(1712~1791)이 쓴 '제사에 대한 글'(1781년) 등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번 작품의 전시가 끝나고 소장자들에게 돌려준 뒤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문화재들로 부자가 합작으로 그린 김두량·김덕하의 '사계산수도', 김정희의 글이 써있는 이재관의 '강이오 초상', 조희룡의 '묵죽도'로 바뀌게 된다.
병술년 새해의 시작을 우리는 무엇으로 했나? 모두가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살아가겠지만 새해 갓밝이(지금 막 밝아진 때)에 조선의 명품 그림들이 주인에게 돌아가기 전 가슴 속에 담아 두면 좋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