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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필름
"아,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북한군 송강호가 회한 어린 표정으로 불쑥 말했다.
"광석인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 야! 광석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우."
그들 등 뒤에선 김광석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북한군과 남한군인 그들은 자기 집 주소를 꼼꼼히 눌러 적고, 주소가 적힌 쪽지를 주고받았다. 오늘은 이들이 북한군 초소에 놀러오는 마지막 날이었다. 다시는 언제 볼지 알 수 없었다. 주고받은 이 주소로 편지를 부칠 수 있을까? 부칠 날이 올까? 씁쓸한 하모니카 소리가 공기를 적셨다. 하모니카 소리가 끝나자 김광석의 노래는 계속 됐다.

"그대들과 즐거웠던/ 날들을 잊지 않게/ 열차시간 다가올 때/두 손 잡던 뜨거움…/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친구들아 군대 가면/ 편지 꼭 해다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그렇게 김광석과 함께 우리에게로 왔다. 죽은 김광석이 이 영화를 만나 다시 부활했고, 이 영화는 김광석을 만나 부상했다. 김광석의 목소리를 타고 영화는 사람들 가슴속으로 짠하게 파고들었다. 386의 향수 속에나 등장하던 '이등병의 편지'는 불현듯 모든 이들 마음속으로 부쳐졌다. 보는 이들 마음은 떨리고 있었고, 그 위로 울려퍼지던 김광석의 노래는 떨림을 통곡으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너무나 충분했다.

박찬욱 감독은 DVD 코멘터리에서 이 장면을 이렇게 설명했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점이죠. 아쉬움을 남긴 채로 끝난다는 것."

이 영화에 또 중요하게 등장한 노래는 김광석의 '부치지 못한 편지'였다. 영화에선 한참 뒤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회상을 통해 짜맞춰진 기억 속에선, 이 다음 장면이었다. 총소리에 놀라 뛰쳐나온 양측 군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총을 쏴대기 시작했다. 조명탄은 하늘을 가르고, 어디를 향하는지 모를 총소리는 요란했다. 그 요란하게 비극적인 상황에서였다. 노래 한곡이 무심히 흘렀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총소리 요란한데, 노래 한곡 무심히 흘렀다

ⓒ 에그필름
어디 <공동경비구역 JSA> 뿐일까? 대한민국 모든 감독들은 김광석이 주는 애절함을 영화 속에서 극적으로 캐스팅했다.

2003년 영화 <클래식>에서 가슴을 저민건 손예진의 눈물 연기도, 눈이 멀어버린 조승우의 연기도 아니었다. 베트남전으로 떠나는 연인이 탄 입영 열차의 창문을 두드리며, 손예진이 "준하야, 살아서 와야돼, 꼭 살아서 와야돼"라고 울먹일 때, 그녀가 달리는 입영열차를 따라 뛰면서 목에 건 목걸이를 벗어서 남자에게 건넬 때, 먼 훗날 다시 만난 연인이 앞을 보지 못한 걸 숨기듯이 마음을 숨기고 목걸이를 다시 건넬 때, 울려퍼진 건 손예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들의 눈물겨운 이별 위로 울려퍼진 애절한 목소리는 김광석이었다.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길/ 그립던 날들도 모두 버리지/ 못 다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영화 속 인물들이 가슴이 먹먹해져올 때마다, 영화 속 인물들 가슴이 아픔으로 떨려올 때마다, 김광석의 노래는 커다란 슬픔의 자장을 그리며 울려 퍼졌다. 2004년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에서도 떠나갈 엄정화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을 생각하며, 김주혁은 라이브 카페에서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불렀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밤을/ 또 잊지 못해 세울까…"

홍반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노래 하나를 타고 애절한 사랑은 관객들 가슴속으로 저미듯이 파고들었다.

2005년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짝사랑한 여자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서서 7년 만에 만났을 때도 흘러나온 노래는 김광석의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이었다. 그리고 올해 2006년, <도마뱀>에서 조승우가 김광석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부를 예정이다.

올해에도 틀림없이 만난다, 김광석과 영화

ⓒ 시네마 제니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DVD 코멘터리에서 음악감독은 말했다.

"시나리오 단계에 '이등병의 편지'가 있었어요. 저는 '이등병의 편지'가 군대에 관련된 노래니까, 군대를 소재로 한 영화에 군대 노래가 들어가면 재미없을 거 같다고 했고요. 박찬욱 감독과 얘길 하면서 그럼 다른 대안이 있으면 찾아보자 했는데. 뭐 제가 찾다가 그보다 더 좋은 곡을 못 찾았어요. 역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계속 '이등병의 편지'로 갔죠."

이 영화에서 '이등병의 편지'보다 더 사람들을 슬픔을 극한으로 몰고 간 '부치지 않은 편지'는 어떻게 등장했을까? 이 영화의 음향감독에 따르면 이건 '상당히 언발란스한 음악'이었다. 그러니 처음엔 액션 장면의 음악 같지 않아 고민했다. 그 장면은 뭐라 해도 북한군과 남한군이 격렬하게 총을 쏴대고 격렬하게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총소리는 하늘을 진동하는데, 김광석 음악이라?

하지만 격렬한 총소리 위로 그 음악을 올리자, 사정은 달라졌다. 전혀 다른 분위기가 탄생했다. 단지 총격씬, 액션 장면에 그칠 듯한 장면은 도리어 가장 슬픈 장면이 됐다. 그건 김광석의 노래가 주는 힘이었다. 그리고 '회한'이었다.

그가 말했다. "거기에 탁 그 음악을 같이 섞어서 들으니까, 무지막지한 느낌이 아니고, 너무너무 슬픈 거야. 그 장면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김광석의 노래가 지닌 마력일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마냥 해피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 모두가 살아도 살아도 가시지 않는 불안을 가슴 한 구석에 안고 살고있지 않은가? 가슴에 돋아나는 슬픔을 남몰래 잘라가며 살고있지 않은가?

그의 노래는, 영화의 힘

ⓒ 위드 33 뮤직
어쩌면 우리들이 김광석을 통해 보는 건, 애절한 추억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픈 애틋함일지도 모르겠다.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박하사탕>의 설경구처럼 대놓고 외치지는 못할지라도, 모두가 잠든 밤 아무도 모르게 "나, 다시 돌아가고 싶어…"라고 속삭이게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 사랑이 비를 맞으며 팔딱이던 그 시절로, 내 심장이 이상과 희망을 향해 파닥이던 그 시절로, 알싸하고 아쉬움이 한가득인 그 시절로! 그리하여 내 딱딱하고 삭막한 이 시간들을 토악질해버리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조용히 자신에게 말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한치 앞도 보이질 않지만, 일어나, 일어나서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김광석이 죽은 지 10년이 지났다. 보통 사람들이 새해를 설계하고,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란 말로 다시 일어설 것을 다짐할 때, 그는 이 세상에서 일어서서 떠나갔다. 그가 사랑한 것들을 모두 두고 떠나갔다. 더 사랑할 것을 찾아서 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승희 시인의 싯구처럼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그는 죽음으로 자유를 얻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자유를 얻은 건 죽음 때문이 아니다. 최승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저 혼자 자유로워서는/ 새가 되지 못한다/ 새가 되기 위해서는/ 새를 동경하는/ 수많은 다른 눈들이 있어야만 한다." (최승자 <희망의 감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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