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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월헌과의 승부를 위하여 장내를 훌쩍 떠나온 것이 무책임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오히려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아직까지 고르지 못한 담천의의 거친 숨결소리만이 물결을 때리고 있었다.

돌아가야만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고 싶지 않았다. 암천을 수놓았던 별들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들었다.

무인에게 있어 피곤이란 독약과 같다. 아무리 처절한 승부를 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피곤을 느끼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무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는 것. 자신도 어느 순간에 저렇듯 피를 뿜으며 죽어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행보에 대한 회의(懷疑)가 밀려들었다. 아니 어쩌면 여음곡에서 생사판관(生死判官) 표공도(表孔道)와 추혼귀견수 하공량의 죽음을 보며 싹튼 것인지 모른다. 도대체 자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고, 무엇을 위해 상대를 베야 하는 것일까? 이 피로 점철된 죽음의 행렬은 어디에서야 멈출까?

머리가 하얗게 비어가는 것 같았다. 어떠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실타래가 엉킨 듯 단편적인 잔상(殘像)만이 어지럽게 그의 뇌리 속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절망감과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부러진 유리검이 박힌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을 빼내거나 상처를 지혈하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와서 자신을 죽인다 해도 일어나거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이 허망했다. 부친의 복수를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무림인이 모두 가지고 있는 꿈 따위는 애초부터 생각해 본적도 없다. 그저 담가장의 혈사가 있던 그날로부터 옆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왔을 뿐이다.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언제나 넓어 보였던 부친의 등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언제나 포근히 감싸 안아주던 어머니의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자신의 손을 꼭 쥐고 있던 동생 소혜의 어린 모습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향해 배시시 웃던 송하령의 얼굴도 떠오른 듯 했다.

그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웅크렸다. 아기가 모태에 있을 때의 그 모습으로 그는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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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끄…응….”

해가 뜬 지 얼마 안 된 시각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풍철한은 유난히 아침잠이 많았다. 진시나 되어야 겨우 눈을 뜨고, 침상에서 반 시진 정도는 족히 뭉기적거리다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모용정(慕容姃)과 독접(毒蝶) 호낭자(胡娘子)가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단사는 아랫도리만 걸친 채 침상에 누워있는 풍철한에게 말했다. 부스스 눈을 뜨는 풍철한의 눈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결국 터졌군.”

“무슨 뜻이에요?”

풍철한은 침상 옆에 놓인 상의를 집어 들어 걸쳤다. 그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는데 얼굴에는 매우 짜증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이 아침잠을 깨워서인지, 아니면 두 여인이 사라졌다는 말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우려했던 일이었어. 헌데 결국 그녀들부터 빼내가는 것으로 시작하는군.”

단사는 풍철한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띠웠다.

“도대체 뭔 말이냐구요?”

“언제 사라진 거야?”

“어제 저녁까지는 분명 있었어요.”

“그 쪽에 있었던 아이들은?”

“다행히 죽이지는 않았어요. 저녁식사 직후 방에 들어가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더군요. 수혈(睡穴)만 짚었어요.”

“따로 감시를 하라고 했잖아? 어떻게 균대위 경비가 이리 허술해?”

분명 단사를 탓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단사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풍철한은 아차 했으나 이미 밷은 말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 아니나 다를까? 단사의 입이 열리며 뾰족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한가로운지 알아요? 이미 새장 안에 갇힌 얌전한 새를 감시하게? 외부 경비도 지금 인원으로는 벅찰 지경이라구요.”

그렇지 않아도 균대위 대소사에 정신이 없는 그녀였다. 아직 완전하게 조직을 갖추지 못한 그녀는 불철주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를 탓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헌데 풍철한이 무심코 그녀를 건든 것이다.

“더구나 호낭자는 영주께서 풍오라버니에게 선물한 여자가 아닌가요? 자기 계집을 잃어버리고 왜 제 탓을 해요? 여자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하고….”

“끄응… 그… 그건….”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호되게 당하고 있었다. 영주가 선물이라고는 했지만 그 뒤로 말 한 마디를 나누어보았나? 손 한번 잡아보았나? 뻔히 알면서도 저러는 것이다.

“알았다. 알았어…. 다 내 잘못이다.”

풍철한은 단사가 더 뭐라고 하기 전에 손사래를 치면서 말을 막았다. 단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다. 그는 얼른 말을 돌렸다.

“황원외는 낙양 쪽에 있고, 장삼은 정주에 있다고 했나?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 거야?”

단사는 밉살스럽다는 듯 풍철한을 한 번 흘겨보았다.

“조오라버니는 어제 신검산장으로 떠났고, 백렴 역시 그 근처에 있을 거예요. 아마 분양현(汾陽縣)에 있는 천병정(千兵鼎)을 조사하는 것 같아요.”

“두칠은?”

“모르겠어요. 강남 쪽으로 내려 간 것 같은데 통 연락조차 해오지 않아요.”

“영주께서 뭔가 중요한 일을 맡기셨나보지.”

사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 것도 없었다. 이미 그런 명령이 있었으니까. 다만 서로를 잘 아는 그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대충 짐작을 한다.

“헌데 아까 한 말은 뭔 뜻이에요? 우려하던 일이라니… 그럼 무슨 일이든 터질 줄 알았다는 말이에요?”

“누군가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있었나?”

“없었어요. 보고받자마자 제가 직접 다니며 수하들을 점검했어요.”

“그럼 폐혈(閉穴)되어 무공도 사용하지 못하는 계집들이 우리의 이목을 뚫고 이곳을 빠져나간다는 게 말이 돼? 아이들의 수혈은 누가 짚었을까? 그 아이들이 아무리 잔심부름이나 하는 아이들이지만 권각법 정도는 익힌 아이들이야.”

풍철한이 침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의 모습을 보며 단사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 아이들이 기척도 느끼지 못한 가운데 수혈을 짚혔다면 상대는 고수다. 더구나 호낭자와 모용정은 폐혈된 지 꽤 오래되었기 때문에 혈도를 풀어준다 해도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최소한 열흘 이상이 걸린다.

그런 그녀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최소 두세 명이 함께 움직였거나 이 내부의 경비나 통로에 대해 손바닥의 손금 보듯 잘 아는 인물이라는 결론이었다. 더구나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으니 일을 저지른 것은 내부인물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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