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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단사는 풍철한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하게 감을 잡았다. 그녀는 문제가 복잡하고 심각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풍오라버니는 진작부터...?"
"아니야. 속단할 필요 없어. 잘 생각해 봐야 해. 과연 우리 중 누가 그만한 능력이 있을까? 한 사람도 제외시키지 말고 차근차근 생각하고 조사할 필요가 있어. 설사 나라고 할지라도 말이지. 물론 지금 이 장원 밖에 나가 있는 동료들도 배제시키지 말아야 해. 적어도 조장들까지는 조사해 보아야겠지. 그들 중 누군가가 은밀하게 스며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풍철한이 몸을 돌려 단사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엉켜들었다. 믿고는 있지만 만약 단사가 적과 내통하는 자라면 이제 무슨 수를 쓰던지 간에 자신을 노릴 터였다. 모험이지만 이제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이상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봐. 어쩌면 우리 누군가가 미리 두 계집의 혈도를 풀어주었을 수도 있어. 그리고는 경비를 허술하게 만들었거나, 허술한 곳으로 빠져나가게 했을 수도 있지."
가능한 추측이었다. 풍철한은 머리 속으로 그녀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떠올리려 애썼다. 이런 정도로 일이 터진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만약 균대위의 수장 중 누군가가 살해되었다면 더욱 심각한 일이 아닌가?
"어쩌면 두 계집을 빼내간 자는 떠났을지 몰라도 이 안에 동조자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우선 어제부터 오늘까지 자리를 비운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해. 다만 네가 철저히 믿을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일을 맡기지 않는 게 좋아. 이런 일은 아주 은밀하게 진행해야 하거든."
"풍오라버니는 저까지 의심하는군요."
단사가 불쑥 말했다. 풍철한은 직선적이고 솔직한 사람이다. 그는 표정을 감출 줄 모르는 사람이다. 특히 형제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눈치 빠른 단사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라 했다. 더구나 이런 일을 조사하고 추론하는 일은 네가 훨씬 뛰어나지. 나는 네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볼 작정이다."
그 말은 정녕 단사까지 믿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허나 단사는 보지 못했지만 고개를 돌리는 풍철한의 입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다....! 육양수(六陽手) 어른과 우검(于劍) 조장(組長)이 한 눈을 팔지 않았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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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는 고요했다. 허나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십여 구가 넘는 시신들이 널려 있었는데 그 중에는 전월헌의 좌우산인 중 한 명인 공환(蚣䴉)의 시신도 보였고, 장내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인물들의 시신들도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장내에 있었던 인물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치열한 혈투를 벌이던 우교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와 싸우던 혁잠(爀箴)과 사혼은? 더구나 모용수와 과노인은? 일엽은? 그리고 그와 싸우던 추학이란 인물은....?
아.... 잿빛 도복을 입고 있었던 추학의 시신이 있었다. 그의 가슴은 일자로 갈라져 핏물을 뒤집어 쓴 채 죽어 있었다. 아마 나머지 시신들은 숲에서 매복한 적들이나 그들과 싸우던 우교의 수하일 가능성이 높았다.
해가 지평선 위로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낼 즈음 저편 관도에서는 네 줄기 신형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네 개의 신형은 단숨에 장내로 날아 들었는데 제일 먼저 다가 선 인물은 바로 균대위의 수장 중 천선위(天璇衛)의 위장 백렴이었다. 그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하기야 분양현의 천병정을 조사하고 있다고 했으니 같은 산서성내에 있었을 것이다.
그의 뒤로 세 명의 사내가 뒤따라 모습을 보였는데 그 중에서는 항주(抗州)의 열락장(悅樂莊)에 모습을 보였던 흑구(黑球)도 끼어 있었다.
"...........!"
백렴은 장내를 일견하자마자 곧 바로 죽어 있는 추학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추학은 만족한 듯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뜨고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먼 하늘이라도 바라보고 싶었던 것일까? 더욱이 속세의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승을 떠나게 되어서 좋았던 것일까?
(추형...! 그냥 봉취루(鳳醉樓)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을 굳이 마다하고 떠나더니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었던 것이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십여 년을 함께 보낸 인물이었다. 한때 균대위의 후지기수 중 선두로 촉망을 받던 인물이 추학이었다. 허나 균대위가 움직임을 멈추고 전대의 인물들까지도 분열이 일어날 때 균대위를 떠난 후 잊혀진 인물이었다
수장이 사라진 균대위에서는 조직의 동요를 막을 수 없었다. 전대의 인물들이 간신히 수습은 했으나 완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미 불신을 받고 있는 비원에서 관장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도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그 맥을 이어온 것은 신검산장에 있는 마노와 도노 등의 충심어린 전대 인물들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육맥신검(六脈神劍).....? 일엽.....?)
백렴은 추학의 눈을 감겨주다가 가슴을 헤집어 놓은 검흔을 보고 문득 한 인물을 떠올렸다. 육맥신검은 점창(點蒼)의 독문검법. 무형기검(無形氣劍)의 일종이다. 갈비뼈마저 예리하게 갈라 놓았고, 검이 들어갈 때 나타나는 흔적은 아주 미세하나 베고 나올 때의 상처는 톱으로 썰은 듯 너덜거리는 흔적으로 보아 육맥신검이 분명했다.
육맥신검은 검에 무형의 기를 실어 상대에게 심대한 충격을 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상대는 상처보다는 그 충격으로 심맥이 파열되어 죽게 되는 무공이었다. 백렴은 추학의 눈을 감겨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일엽에게 당하셨구려. 철규자(鐵叫子) 어른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겠군.)
철규자는 추학의 사부. 절제된 생활과 엄격함이 몸에 배어 언제나 대하기 어려웠던 분이었다. 백렴은 장내를 쭉 둘러보았다. 부서진 마차가 서 있었고 시신 중에서도 아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영주는 어디로 가신 것일까? 왜 자리를 뜬 것일까? 무슨 급한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때였다. 두 개의 신형이 빠르게 장내에 내려서고 있었다. 백렴과 나머지 세 인물은 긴장을 하며 하시라도 출수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앞에 나타난 인물을 보는 순간 백렴은 언뜻 반가운 기색을 띠웠다.
"우문주시구려."
나타난 인물은 우교였다. 그의 옷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고, 옆구리 근처에 상처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리 심각한 모습은 아니었다. 더구나 뜻밖에도 그의 옆에는 살천문 잠형각(潛形閣)의 각주(閣主) 잠백(暫魄)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백렴 위장이라고 하셨던가?"
"그렇소. 문주께서 소제의 이름까지 기억하실 줄은 뜻밖이오."
백렴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영주를 못 보셨는가?"
"같이 계셨던 분이 지금 당도한 소제에게 물으면 어찌하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백렴의 입에서 긴장된 목소리가 나왔다. 영주를 호위하던 우교의 입에서 영주의 소식을 묻는 말이 나오자 근심이 앞섰던 것이다. 어찌 들으면 우교를 힐책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허나 우교는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영주께서 돌아오셨느냐 물어야 할 것을 잘 못 물었군. 영주께서는 전월헌이란 자와 승부를 하기 위해 장내를 떠났네."
"백련교 열 명의 사형제 중 한 명...? 영주께서 그 자를 따라가셨단 말이오?"
"그렇네. 사영천을 이끌던 자이지."
"그 자가 무슨 수작을 부릴 줄 알고..... 문주께서는 그냥 내버려두었단 말이오?"
"본 문주 역시 몸을 빼낼 수 없었네. 또한 그 자의 무위는 놀라웠지만 영주는 그리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있었네. 헌데 지금까지 돌아오시지 않았다면...."
우교 역시 얼굴을 굳혔다. 아직까지 혈투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생각하기도 싶지 않지만 정말 그 자에게 당한 것일까? 그 역시 걱정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당시 담천의를 뒤쫓아 가거나 도울 수 없는 입장이었다. 추학을 베고 난 일엽이 합세하자 우교는 큰 위기에 몰렸던 것이다. 아마 잠백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자신마저도 당했을 것이다. 기이한 것은 그들이 어느 순간 황급히 도망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장내에는 과노인과 모용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두려움을 느낀 사혼이 먼저 도망가는 바람에 가까스로 공환 하나만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추적했던 것인데....
백렴은 더 이상 우교를 탓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모습만으로도 얼마나 급박한 혈전을 치렀는지 짐작이 갔다.
"찾아봅시다. 영주께서 살아만 계신다면 표식을 남기셨을 것이오."
백렴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세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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