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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오르는 길목에서
만물상 오르는 길목에서 ⓒ 이기원
만물상을 안내하는 조장의 말입니다. 가다가 힘들어 포기하더라도 올라간 만큼의 모습에서 충분한 만족을 느낄 만큼 만물상의 모습은 다양하고 멋지다고 합니다.

만물상을 오르는 골짜기에서 쏟아지는 바람이 고추처럼 매웠습니다. 어제 날씨가 별로 춥게 느껴지지 않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아 매운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험한 산길 걷다보니 땀도 나고 몸도 훈훈해졌습니다.

"저기 솟은 바위가 삼선암입니다."

올라가는데 북측 안내원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치솟은 봉우리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는 모양입니다. 상선암은 날카롭기가 창과 같고 중선암은 자루와 같이 뭉툭하며 하선암은 주먹 같은 불뚝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셋 가운데 제일 인상적인 것이 상선암입니다.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바위인데 어찌 저리 날카로울까요? 손이라도 가져다 대면 금방이라도 선홍빛 피가 배어날 것처럼 느껴집니다.

삼선암
삼선암 ⓒ 이기원
삼선암에서 조금을 더 올라가면 만물상의 장관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전망대에 해당되는 정성대에 도착합니다. 전망대라고 해서 먼 산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망원경이라도 설치된 곳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계단을 따라 정성대 정상에 이르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습니다. 만물상의 갖가지 기암괴석들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정성대에 올라가서 제일 먼저 찾은 게 귀면암입니다. 비 내린 뒤 죽순 솟아나듯 사방에서 솟아오른 기암괴석의 틈에서 귀면암이 단연 돋보입니다. 날카롭게 솟아난 바위 절벽의 틈바구니에서 둥근 얼굴 모양을 한 바위가 귀면암입니다.

귀면암
귀면암 ⓒ 이기원
"저게 무슨 귀신 얼굴이야?"
"팔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 같은데."
"특이하긴 하다."

금강산은 일만 이천 봉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봉우리 중에 비슷하게 생긴 게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전해지는 얘기도 많습니다. 그 많은 얘기들은 바위 얘기가 아닙니다. 금강산에 의지해 살던 무수하게 많은 이들의 삶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건 자신을 둘러싼 자연에 정 주고 마음 주며 자신의 정서와 감정을 쏟아 자신의 얘기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게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어 후세에 전해집니다.

귀면암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람과는 달리 귀신은 신통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신통력을 가지고 쌓인 한을 풀고 못된 사람을 혼내줍니다. 전설 속의 귀신이 힘없고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못된 이들, 자신의 사욕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이들에게 응징을 가합니다. 그게 바로 힘없는 이들의 바람입니다. 귀면암이 갖는 의미도 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성대에서 계단을 내려와 다시 만물상을 향해 올라갑니다. 발걸음에 힘을 주다 문득 올려다보면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눈에 익은 기묘한 봉우리들이 눈부신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많기만 하면 그 많은 봉우리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가슴에 담고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면 다시 오기 쉽지 않은 분단의 땅 북한에 금강산이 있기에 아쉬움이 훨씬 더했습니다. 그래도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아쉬움을 천선대 입구 촛대바위 아래로 던져버리고 망양대로 향했습니다.

촛대바위
촛대바위 ⓒ 이기원
망양정 아래로 펼쳐진 눈부신 동해바다

"선생님들은 운이 좋습네다."
"왜요?"
"날씨가 좋아 망양정에서 동해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금강산에서 동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분단의 땅 북한 금강산에서 동해를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힘이 솟았습니다.

오르는 길이 험하기는 만물상보다 더 했습니다. 철제 사다리까지 만들어놓은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옛 조상들은 어떻게 이 산을 올랐을까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문명의 이기로 둘러싸인 현대인들의 체력이 형편없이 약해진 데 비해서 자연 속에서 험한 삶을 살았던 시절의 사람들은 강철 같은 체력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 금강산의 험한 길도 날다람쥐처럼 가볍게 올랐을 거라 생각됐습니다.

수직에 가까운 철 계단을 타고 오르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맨땅보다 바위가 더 많은 산이 금강산입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산이 없다는 말만 믿고 가다보니 파란 하늘이 점점 가깝게 느껴집니다. 날씨는 여전히 차고 맵습니다. 망양대 정상에 다다를 즈음 뒤따르던 선생님이 고드름 얘기를 했습니다. 바위 끝에 고드름이라도 있는가 싶어 어디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뒤통수에 달렸잖아."

그 말을 듣고 손으로 뒤통수를 더듬었더니 얼음조각이 손에 잡힙니다. 산에 오르느라 흘러내린 땀이 추위로 인해 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온통 금강산에만 정신을 쏟고 올라왔습니다. 남달리 땀이 많은 체질이라 여름철 산행은 땀으로 목욕을 합니다. 겨울철은 땀이 많이 나지 않아 좋기만 하다 여겼더니 이런 일도 있구나 싶어 으스스 소름이 돋았습니다.

"한 군데 오래 머무르지 말고 계속 움직이면 괜찮아."

뒤따라오던 선생님이 등을 떠밀었습니다. 그 말에 힘을 얻어 다시 올라갔습니다. 망양대 정상도 멋들어진 바위조각의 향연이었습니다. 그 풍경을 사진에 담기 위해 괜찮다 싶은 곳이면 어김없이 셔터를 눌렀습니다. 기암괴석에도 아랑곳없이 뿌리박고 살아온 고목들이 의기양양 포즈를 취하고 서서 한 장 찍으라고 손짓했습니다.

망양정 정상의 모습 1
망양정 정상의 모습 1 ⓒ 이기원
망양정 정상의 모습 2
망양정 정상의 모습 2 ⓒ 이기원
그러다 문득 동쪽을 보았습니다. 아스라니 먼 거리도 아닌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동해가 보였습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망양대에서 바라본 동해의 기막힌 아름다움을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하늘 끝을 못다 보아 망양정에 올라가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이나 노한 고래 그 누가 놀랬길래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지고
은산을 꺾어내어 천지사방 내리는 듯
오월 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꼬


망양정에서 내려다 본 동해바다
망양정에서 내려다 본 동해바다 ⓒ 이기원
비록 고래가 물을 뿜으며 노니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송강 정철이 느꼈던 감격이 이해될 듯도 싶었습니다. 그 장엄한 모습에 취해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곰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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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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