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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기억할 수 있는가?”

“물론이오. 맨 먼저 찾아오신 분은 황보가주이셨소. 아마 그 때가 신시(申時) 말 쯤 되었을 거요. 그 분은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무당파 장문인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금방 자리를 뜨셨소.”

어찌 기억하지 못하랴! 아무리 제마척사맹으로 전 무림인들이 뭉쳤다고는 하나 장사 구석에 박혀있던 천궁문주를 무림세가의 가주와 무당파의 장문인이 방문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단세적이 직접 찾아간다 하더라도 만나줄지 장담할 수 없는 인물들이 아닌가?

“무당의 장문인께서도 오래 계시지는 않았소. 그 분이 돌아가시자 밖에서 한참 기다리고 있었던 화령문(火靈門)의 진문주(晋門主)께서 들어가셨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소.”

화령문의 문주인 진붕(晋朋)은 이곳에 같이 온 처지로 신기수사(神機秀士) 서승명(徐丞明)을 잃을 당시 같이 부상을 당한 터라 동료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남의 일 같지 않게 축하해 주었을 것이니 호탕한 웃음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진문주는 언제 돌아간 것인가?”

“꽤 오래 계셨소. 아마 어둑해질 때니까 유시(酉時) 말쯤이 아닌가 싶소.”

그렇다면 유시까지는 확실하게 살아 있었다는 말이다.

“그 뒤로는?”

“칠결방(七結邦)의 진방주가 오신 후 일각이 못되어 곧 바로 동정채(洞庭寨)의 나채주께서 오셨소. 세 분이 함께 말씀을 나누셨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소.”

이리되면 올만한 사람은 모두 와 보았다는 말이었다.

“그 뒤로 모용가주와 당가의 독혈군자께서 같이 오셨는데 세 분이 저녁식사를 같이 하셨소.”

“그 분들이 마지막이었나?”

“그렇소. 저녁 식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용가주께서 먼저 가셨고, 독혈군자께서는 반 시진 정도 더 계시며 말씀을 나누시는 것 같았소.”

아마 독혈군자 당일기는 단세적과 수리를 잡는 일을 더 상의했을 것이다. 몇 마리 남지 않았으니 좀 더 효율적인 방안을 상의했을지도 몰랐다.

“그럼 단문주가 죽은 것은 언제 안 것인가?”

“거사께서 부르신 그 때 전갈을 받고나서 들어와 보니 이리되신 것을 본 것이오.”

구효기는 이미 야간에 더 나타날지 모르는 수리들을 잡는 것이 좋겠다고 이미 단세적에게 귀뜸한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단세적은 자신이 부르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구효기는 잠시 단세적의 사망시각을 추론해 보았다. 자신이 단세적을 부른 시각이 해시(亥時)였으니 술시 말에서 해시 초에 당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당노제가 돌아간 시각이 언제쯤인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술시 말 정도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오.”

“그 뒤에 단문주를 찾아 온 사람은 없었나?”

“없었소.”

구효기는 흘낏 목득을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죽어있는 단세적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단세적의 시신 옆에 몸을 낮추고 탁자 위를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 흐른 찻물이 일부만 말라 있는 것으로 보아 죽은 지 채 반시진이 지나지 않은 게 확실했다. 그 때였다.

“무슨 일로 부르신 거요?”

단세적의 천막 안으로 불쑥 들어오며 말을 건넨 인물은 구양휘였다. 구효기는 고개를 돌려 구양휘를 보았지만 그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구양휘는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구효기는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아직 알리지 않았고, 천궁문의 인물들에게도 일단 입 밖에 내지 말 것을 당부했다. 흉수나 그 밖에 연락을 하는 자들은 알고 있겠지만 되도록 조사가 끝난 후에야 알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만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구양휘에게만 급히 전갈을 해 단세적의 거처로 오라고 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작자가 이런 짓을 한거요?”

구양휘 역시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지금부터 그것을 밝혀야 하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네 도움이 필요하네.”

“이런 일은 의숙이 전문가 아니오? 제가 뭐 도울 일이 있겠소?”

구효기가 고개를 홱 돌리며 구양휘를 노려보았다. 구효기가 화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헌데 화가 매우 나있는 얼굴이었다. 구양휘가 찔끔하며 구효기의 시선을 피했다.

“알겠소. 알았으니까 뭔 일이든 시키기만 하슈. 분골쇄신 노력하겠소.”

“시킬 일이 아니야. 이 일은 자네가 전적으로 해결해 주게나.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럴 정도로 시간이 많지 않아.”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중요한 시기였다.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이 이 일에 전념하게 되면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그렇다고 이 사건은 대충 처리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내부의 적이 있음이 확인된 이상 조속히 해결하지 못한다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뻔했다.

더구나 이제는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었다. 결국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했다. 구양휘 밖에는 없었다. 구양휘는 의외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의숙은 제가 이 사건을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정말로 믿는 것이오?”

구효기는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끄떡였다.

“물론이지. 제마척사맹 안에서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자네야. 자네의 형제들과 자네의 두뇌 역할을 하는 바로 그 여자라면 노부보다 더 조속히 흉수를 잡아낼 수 있겠지.”

그 말에 구양휘는 맥이 풀렸다.
(눈치 빠른 노인네..... 벌써 다 알고 있었구만....)

“현장은 되도록 그냥 두는 것이 좋을 게야. 현장은 많은 단서를 제공하지. 아무리 완벽한 계획 하에 저지른 일이라도 허점은 반드시 있는 법이거든.”

그것은 구양휘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옆에 있는 무진권 목득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현장을 치우거나 정리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이건...”

구양휘가 뭐라고 변명을 하려하자 구효기가 말을 잘랐다.

“이것은 자네에 대해 부탁이기도 하지만 제마척사맹의 맹주를 대행하는 입장에서 하는 명령이기도 하네.”

“끄 - 응---”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더구나 뒤에 이어지는 구효기의 말은 구양휘를 몹시 바쁘게 하는 말이었다.

“이곳에 들어 온 제마척사맹 군웅들의 목숨이 자네 손에 달렸어. 이틀 안에 흉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서로 상잔하며 자멸할 수도 있을 게야.”

“너무 촉박하지 않소?”

“노부라면 이런 쓸데없는 변명을 하는 시간에 형제들을 빨리 이곳에 오게 하겠네.”

“빌어먹을....”

구양휘의 입에서 무의식중에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일은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해야 했다. 구효기가 왜 자신에게 이 사건을 맡겼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기야 유곡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제 83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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