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인디언 부락민의 살아가는 모습이 소박하게 묻어있다
인디언 부락민의 살아가는 모습이 소박하게 묻어있다 ⓒ 코비스

수우족의 옛 부락이자 영화 <늑대와 춤을>의 현장인 이곳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주. 인디언들의 문화는 토지에서 비롯한다. 그들의 자연 숭배 사상과 유럽인 기독교 문명의 충돌이 곧 영토의 분쟁과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언덕위에 서서 신과 대화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시를 지어 노래하던 음유 시인. 낭만과 투사의 정신을 공유하는 민족. 목숨보다 소중한 우정을 간직했던 그들이다.

러시모어 산(Mount Rushmore Memorial)에 새겨진 역대 대통령 얼굴은 미국 정치사의 커다란 이념이지만 인디언 투사인 크레이지 호스의 바위 얼굴은 패자의 설움을 딛고 부활하는 원주민의 절규를 그려내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가까운 거리에 두 개의 바위산을 두고 그들은 침묵 속에 교감하고 있다. 큰 바위 얼굴이 미국 역사의 힘찬 전진과 웅장함을 대변한다면 크레이지 호스는 학살에 의해 사라진 영혼을 부르는 형상이다.

러시모어 산위에 세워진 대통령은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초대), 독립 선언문의 토머스 제퍼슨(3대), 남북 전쟁의 에이브러햄 링컨(16대), 미국 융성의 엔진인 티어도어 루스벨트(26대) 등 4명이다. 1927년에 착공해 1941년에 완공을 보았으니 17년의 세월이 걸렸다.

역대 대통령을 새긴 큰 바위 얼굴의 형상
역대 대통령을 새긴 큰 바위 얼굴의 형상 ⓒ 코비스
정상 높이는 해발 1,717m다. 큰 바위 얼굴은 조각가 거츤 보글럼(Gutzon Borglum:1867∼1941)이 그려냈으며 그는 불행히도 최종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941년 3월에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아들 링컨 보글럼이 그 작업을 승계해 나갔다. 1941년 10월에 드디어 완공을 이루었지만 공식 제막식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91년 6월에 열렸다.

크레이지 호스는 그 곳에서 27km 떨어져 같은 산줄기에 자리잡고 있다.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성난 말)는 미국이 남북전쟁 후 인디언과 영토분쟁이 치열했던 시기인 1876년 용맹을 떨쳤던 수우족 전사의 이름이다. 인디언식 이름은 타슈카 위트코(Tashuka Witco). 크레이지 호스는 리틀빅혼 전투에서 미국 제7 기병대 존 커스터의 군대를 대파하는 공적을 세운 인디언의 전설적 영웅이다.

크레이스 호스의 전신상은 1948년 착공되었으나 아직 미완성 상태이다. 얼굴 모습이 우선 완성되었다. 높이 171미터, 길이 195미터나 되는 크레이지 호스상은 올해까지 56년째 조각되고 있다. 그의 얼굴에 전사의 정기가 서려있다. 바위를 뚫고 나올 만큼 커다란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조각가 코자크 지올코브스키(Korczak Ziolkowski:1908∼82)는 폴란드계 미국인으로서 보스턴에서 출생했다. 큰바위 얼굴의 작업이 끝날 즈음인 1939년 그는 수우족의 추장 헨리 스탠딩 베어(Standing bear:서 있는 곰)로부터 인디언 땅 위에 인디언의 영혼을 담은 조각을 제작해 달라는 제안서를 받게 된다. 그는 크레이지 호스의 신화적 삶에 매료되어 작업 결의를 굳힌다.

편지를 받은 지 8년 만인 1947년 5월 그는 블랙 힐스에 날아왔다. 높이 169m, 길이 201m 규모로 형상은 지어졌다. 1948년 6월3일 첫 번째 발파를 하던 날, 착공식에는 리틀 빅혼에 참전했던 노령의 수우족 전사 5명도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전기·물·도로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장정에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크레이지 호스의 얼굴 크기가 우측 아래 관광객의 모습과 대비된다
크레이지 호스의 얼굴 크기가 우측 아래 관광객의 모습과 대비된다 ⓒ 코비스
그는 1982년 10월,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지 35년간 750만t의 돌을 깼다. 자금이 턱없이 모자랐으나 그는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지 않았다. 이 조각 프로젝트의 모든 예산은 일반인들이 낸 입장료 및 기부금과 화강암 조각 세공품을 판매한 돈으로 충당되고 있다. 그가 죽은 뒤 부인과 10명의 자녀들이 작업을 물려받았다. 드디어 그의 사후 16년 뒤인 1998년 6월 얼굴상이 완공됐다. 착공 50년 만이었다. 감동적인 제막식이 열렸다. 인디언 패망 이래 최고의 작품이 자연 위에 그대로 예술품으로 전시된 것이다.

크레이지 호스는 1842년 블랙힐스 인근 래피드 계곡에서 주술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라코타 수우족 출신으로 테톤 오글라라(Oglala)족의 지도자로 나선다. 1863년에는 훙파파 수족(hungpapa sioux)의 수렵 구역에 침입한 백인들을 물리쳤고 1876년에는 테톤 수 부족연합(Teton Sioux Nation)의 대추장이 되었다. 1876년 6월25일 제 7기병대장인 커스터 중령이 리틀 빅혼 계곡에 도착하면서 전투는 시작된다.

샤이엔(Cheyenne)족과 수우족의 연합부대 3,000여명이 매복해 기다리고 있었다. 인디언측이 추장 시팅 불(Sitting Bull:앉은 황소)의 주도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크레이지 호스는 야전의 전사를 총지휘했다. 커스터는 자신의 연대 병력을 600명을 동원해 공격했으나 인디언들에게 무참하게 패전하고 말았다.

첫 전투에서 인디언은 승리했지만 반격의 공포가 몰아쳤다. 크레이지 호스는 기진맥진한 1,000명의 부족을 이끌고 인디언 거주지역으로 도피했다. 그는 1890년에 유령춤 운동에 관련 혐의로 네스라스카에서 그를 체포하려는 기병대원들에 의해 사살당하고 만다. 전통 장례의식 속에 동료 인디언들의 애절한 송가를 들으며 그는 원주민 고향의 묘소인 운디드니(Wounded Knee:상처난 무릎) 땅에 부모에 의해 말없이 묻혔다.

1890년 12월. 수우족 일족 400여명은 운디드니에서 커스터의 옛 부대인 제7기병대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간다. 운디드니 공동묘지에서 크레이지 호스의 시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항쟁은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바람을 맞으며 황량한 언덕 위에 세워진 비석에서 크레이지 호스의 안타까운 한 줄기 신음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그들의 땅에 지금 다시 겨울이 찾아와 있다.
눈은 또 다시 쌓여 온 세상을 순백의 휘장으로 덮고 있다.

인디언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부락은 멀리 떠나 있고
그들 육신의 숨결은 멈추었으나
지금 저 바위의 얼굴을 타고 내리는 정기는
대평원을 향해 호령하던 전사의 함성을 살리고
태양을 향해 기도 올리는 추장의 기원을 담고 있다.

눈 속에 푸근하게 잠들어 있을 그들 영혼을 위해 봉화를 지펴 올린다.

봄이 오면 그 언덕에 다시 꽃피고
따사로운 햇살 내리쬘지니
그들의 얼굴이 크게 웃어 보일 것이다.

큰 바위 얼굴의 영광 뒤에
그들이 살아 있다.
원주민의 땅을 지키고자
피를 흘렸던 갈기머리 청년들,
돌과 바람과 구름을 사랑했던 전사여-

장렬히 죽어간 그대들
영혼이 잠든 토지 위에
침묵 지키는 바위 얼굴 위에
휘날리는 눈발 걷히는 날,

그대 크레이지 호스의 영광이여-
창공의 날개로 부활하여라.

힘찬 북소리 울리면서
말발굽 소리 밟으면서
저 평원 끝으로
몽골리안의 후예답게
눈이 부시도록
그렇게 달려 가거라.

<시:김준하 작>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에서  바라본 바위산의 모습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에서 바라본 바위산의 모습 ⓒ 코비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준하 기자는 미조리 주립대애서 신문방송학을 수학하고 뉴욕의 <미주 매일 신문>과 하와이의 <한국일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시사 주간신문의 편집국장을 거쳐 현재 로스엔젤레스의 부동산 분양 개발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라스베가스의 부활을 꿈 꾸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