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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된 명주저고리와의 첫만남
"와, 이 저고리는 박물관에나 가야 되겠네."
"얘, 지금은 이래도 그 당시에는 꽤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남들은 송구영신이네 송년회네 하며 들뜨는 연말연시, 우습게도 나는 이삿짐과 씨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해 벽두부터 17년이나 살던 아파트에서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됐고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채 17년 동안 쌓여 온 심적 물적 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짐들은 모두 제3자가 아닌 나 스스로 정리해야 할 것들이었다.
미처 정리되지 못한 돌아가신 선친의 흔적을 통해 과거를 곱씹으며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어머니의 저고리 한 뭉치를 발견했다. 조선시대 사극에나 나옴직한 고운 꽃분홍색과 자주고름 저고리는 1946년 어머니가 시집을 오면서 혼수로 해 온 여러 종류의 명주 저고리 중 하나였다.
1946년 당시만 해도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들은 시집가면 마음대로 저고리 하나 못해 입을까봐 평생 두고두고 입을 만큼의 저고리를 혼수로 보냈다고 한다. 그것이 풍속이기도 했다고.
저고리는 한 번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무명실로 꼼꼼하게 봉해져 있었다. 이 명주 저고리에는 시집갈 딸을 걱정하며 한 땀 한 땀 정성껏 만든 외할머니의 정갈한 손재주와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귀한 정성을 아는지라 아껴 입느라고 입고 싶어도 참으면서 모아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은 우리 생활에서 한복을 밀어내 버렸고 그럭저럭 세월이 지나 유행에 뒤처진 저고리는 우리 어머니의 장 속에서 세월을 정지시킨 채,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귀하신 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처럼 귀한 사연을 모두 끌어안고 갈 수 있을 만큼 현실의 아파트 평수는 넓지 않았다. 저고리는 아깝지만 버려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 동의한 순간, 나는 물건은 버리되 사연은 간직하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추억을 간직하는데 디지털이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성을 다해 한 컷 한 컷 찍고 난 후 찍은 화면을 액정으로 일일이 어머니께 보여드렸다. 그 후 저고리를 쓰레기봉투에 넣으려는 순간, "잠깐 멈추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요?"
"아무리 그래도 이 아까운 명주 저고리를… 다 가져가지는 말고 요것만 가져가자."
디지털이 담보할 수 있는 추억의 크기는?
어느새 어머니는 쓰레기봉투에서 빛깔 곱고 그중 상태가 나은 명주 저고리 3장을 다시 꺼내놓으시고 애원조로 말씀하셨다. 결국 어머니가 쓰레기봉투에서 살려낸 명주 저고리 세장은 다시 새 생명을 얻고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삶을 얻었으니 그야말로 지지리도 복도 많은 녀석인 것 같다.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보된 디지털 기술은 어느덧 인간의 추억과 역사까지 저장할 수 있고 담보한다고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디지털의 위력은 쓰레기통에 직행하는 운명의 철지난 저고리를 박물관에 전시한 듯 산뜻하게 보이는 저고리로 만들어 이미지로 저장할 수 있고 생각날 때마다 수 백 수천으로 복사할 수 있으니 신통한 기술임에는 틀림없다. 그뿐인가? 디지털 기술이면 낡은 할아버지의 너덜너덜한 흑백사진도 산뜻한 칼라사진으로 바꿔 출력할 수 있고 주름살 낀 할머니의 모습도 마음만 먹으면 주름살 없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신통방통한 디카로 추억의 이미지를 만들어 저장한다고 해도 과연 그 안에 숨겨진 모든 추억들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을까?
디카에 저장한 꽃분홍색 어머니의 저고리 이미지에서 과연 실물에서 만지며 느낄 수 있는 외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을 느낄 수 있을까?
디지털이 아무리 진화한다 해도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아마 추억, 감정, 촉감, 냄새, 맛과 같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영역이 아닐까? 이는 디지털이 흉내낼 수도, 감히 흉내내어서도 안 되는 것일지 모른다.
아무리 아무것이나 다 먹어치우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이라도 인간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란 사실을 생생하게 알려준 저고리. 이날의 진정한 승리자는 세 장의 저고리였다.
덧붙이는 글 |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분투기56번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