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0일 한미 양국이 워싱턴에서 열린 첫 장관급 '전략대화'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함에 따라 그 의미와 파장에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이미 용산기지 및 2사단 재배치에 합의해준 데 이어, 전략적 유연성까지 인정해 줌으로써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정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미국이 군사 패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추진해온 핵심적인 계획이다. 지금까지 주한미군이 '북한의 남침 억제'라는 고정된 임무를 수행했다면, 앞으로는 이러한 임무의 상당 부분을 한국군에게 넘기고 주한미군은 미국의 필요에 따른 작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그 근본적인 성격이 바뀌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용산기지 및 2사단 재배치와 병력 감축, 그리고 전력 증강이 주한미군 재편의 '하드웨어'에 해당한다면, 전략적 유연성은 이러한 하드웨어를 운영하기 위한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
전략적 유연성의 우선적 대상은 '북한'
미국이 전략적 유연성을 비롯한 주한미군 재편을 추진해온 목적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이라크 침공이 보여주듯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외피를 쓰고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전쟁에 주한미군을 신속하게 차출·투입시키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의 부상을 위협으로 간주하면서 중국을 군사적으로 봉쇄하고 유사시 주한미군의 개입을 가능케 하며, 셋째는 북한에 대한 예방적·선제적 군사 행동을 원활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 언론은 주한미군의 한반도 밖 출동 및 이에 따른 국제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지적이 타당성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전략적 유연성의 한쪽 측면만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략적 유연성의 우선적인 목표는 바로 북한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부시 행정부는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선제공격을 단행할 수 있다는 전략을 공식적인 국가안보전략으로 채택한 바 있고, 그 선제공격 대상에는 북한도 포함되어 있다.
9.19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무력 불사용 약속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전제로 한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북핵 문제가 끝내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 무력 사용 옵션은 다시 등장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부시 대통령은 지난 2003년 3월 초 미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외교적 해결을 확신한다"면서도 "외교가 실패할 경우 군사력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며 "그것은 마지막 선택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외교가 실패할 경우 군사력이 마지막 선택"
미국이 신군사전략에 따라 북한에 대해 예방적·선제적 군사행동을 나설 만한 시나리오는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부시 대통령도 언급한 것처럼, 북핵 문제가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아 핵무장을 예방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선제공격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 내에 급변 사태가 발생해 대량살상무기가 위험세력의 손에 넘어가거나 외부로 이전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군사적 투입이다. 이는 작전계획 5029 논란에서도 이미 나타난 바 있다.
끝으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 행동이다. 이는 이미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을 통해 실행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해 주한미군도 이 작전에 투입시키겠다는 것이 미국의 생각이다. 더글라스 페이스 미 국방부 차관이 2003년 12월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GPR)를 설명하면서 "PSI를 실행하기 위해 GPR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주한미군의 세 가지 키워드: '생존율' '공격성' '치명성'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지금처럼 주한미군이 전방에 '붙박이형'으로 주둔하고 있으면 이같은 군사 작전이 어렵다고 판단해왔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 기지 재배치와 전력구조 재편, 그리고 전략적 유연성 확보를 강력하게 추진했던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을 비롯한 주한미군 재편은 세 가지 키워드를 갖고 있는데, '생존율'과 '공격성' 및 '치명성'의 강화가 그것들이다. 실제로 주한미군 재편이 완료되면, 미국은 북한의 보복 능력을 크게 약화시키면서 공격력과 방어력을 대폭 강화시킬 수 있게 된다.
전방 배치된 주한미군이 감축되고 후방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주한미군이 북한의 야포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주요 미군 기지에 패트리어트 최신형인 PAC-3 등 미사일방어체제(MD)를 배치함으로써, 유사시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대한 방어력도 배가시켜 놓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주한미군 '생존율' 강화와 관련된 부분이다.
아울러 공격성과 치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C4I 및 감시·정찰 능력, JDAM을 비롯한 정밀유도무기, 2사단의 미래형 사단으로의 개편, F-15E 및 F-117 스텔스 전폭기 등 공군 전력의 신속 배치능력 확보, 주한미군 이외 전력의 신속한 배치 등을 실행하고 있다. 북한이 주한미군 재편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핵 억제력 강화'를 공언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주한미군 재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불투명하던 6자회담에 또 '악재'
북한이 전략적 유연성을 비롯한 주한미군 재편에 강력히 반발해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번 한미 양국의 합의는 6자회담에도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북한의 위조지폐 및 이에 대한 미국의 금융제재 문제로 회담 재개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예방적·선제적 군사 행동의 가능성을 담은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합의가 나왔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는 9.19 공동성명에서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뒤인 작년 10월에 북한을 상정한 모의 핵공격 훈련을 한 것이 확인되어 북한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한 바 있다. 당시 북한은 미국의 훈련이 9.19 공동성명을 위반한 것이라며 '핵 억제력 강화'를 공언한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은 이번에도 한미 양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합의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핵 억제력 강화'를 공언하고 이를 위한 핵 시설 가동에 박차를 가할 공산이 크다. '평화적 해결'을 공언하고 있는 미국의 의도가 결국 시간을 끌면서 북한에 대한 강압조치를 취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갖추려는 데 있다는 판단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겨우 1차 회의, 왜 벌써 합의했나
또 전략적 유연성 합의의 한 축이 남한이라는 점에서 남북관계도 순탄치 않을 수 있음을 예고한다.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 종속국'이라는 북한의 인식을 강화시키면서, 남한과 한반도 군사문제 해결을 위한 군사회담에 더욱 소극적으로 나올 공산이 커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합의는 노무현 정부의 '전략적 오판'이자 '전략적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략대회가 1차 회의였던 만큼, 충분한 시간과 검토를 거치면서 풀었어야 할 문제인데도 너무 쉽게 합의해주고 말았다. 또한 국민들에게 막대한 경제·안보적 부담을 야기하고, 6자회담 프로세스를 불안하게 만들며, 대북·대중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