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스러웠던 2002년 10월 29일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나의 글이다. 가슴 속 언어이다. 그랬다. 2002년 10월 말 나의 심경은 이랬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노무현 후보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이런 절박함과 고마움이 어디 나 하나 뿐이었으랴!
3년이 훌쩍 지나가버린 지금,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고 발견한 '승복을 모르고 반칙이 판을 치는 세상, 정도를 버리고 훼절을 일삼는 세상에 정동영은 더욱 커보입니다'라는 주제의 기고문에 침잠해본다.
어둠과 여명이 교차하는 새벽 4시다.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 굽이굽이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와 기간은 짧지만 곡절 많았던 최근의 5~6년의 과거를 생각해 본다.
'일본은 미국이 점령한 필리핀을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다'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눈치챈 조선 민중은 단 한명도 없었다. 우리의 운명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손에 넘겨지면서 우리의 슬픈 100년의 현대사는 시작되었다.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우리의 말과 글, 영혼과 양심은 신음했다.
해방이 되었다. 그것은 동시에 분단과 전쟁의 출발이었다. 1948년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쟁취한 민주주의 권력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곡소리 없는 집이 없었다. 전쟁은 잔인했고 전후의 포연과 소총 자국은 지금도 말끔히 가시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보릿고개와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고개를 힘겹게 넘어야 했다. 남과 북은 지금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180만 젊은이들이 긴장 속에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통일을, 경제를, 자주의 역사를 앞으로 밀고 나갔다. 정권이 교체되었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다.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우리는 '민주화 이후의 시대'에 해마다 밀려오는 도전과 개혁과제에 또다시 응해야 했다.
80년대는 80년대 시대정신으로 투쟁해야 했고 21세기 과제는 21세기 정신으로 개혁하고 소통해야 했다. 형식 민주주의를 넘어 절차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참여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야 했다. 그것을 이룩하는 데 지역구도 타파와 국민통합이라는 과제는 21세기 초반 한국정치의 최대 개혁과제로 다가왔다.
21세기 노무현과 정동영의 리더십을 생각해 본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봄이 왔는데 정치는 낡고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1987년의 최대의 개혁 이슈가 대통령 직선제 관철이었다면, 2001년 정치권의 최대 개혁 이슈는 밀실정치 제왕적 총재에 의한 1인 계파 보스정치의 타파였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듯이 적어도 2001년 당시 공천권을 쥐고 있는 절대 권력에의 도전은 정치생명을 걸어야 했다. 민주당 쇄신정풍운동 때 그랬다. 모두 다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일어서서 외치려 하지 않았다. 절대권력 앞에 소리쳐 외친 사람이 바로 정동영이었다.
2002년. 이 해의 최대의 개혁 성과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었다.
민주당 비주류 노무현은 '노풍'을 타고 당당하게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노 후보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후단협의 반칙이 시작되었고 '후보 흔들기'라는 반칙이 감행되었다. 그 위기의 상황에서 "아니다, 당신들이 틀렸다, 노무현으로 가자!"고 치고나온 것은 다름 아닌 정동영이었다.
국민경선을 주창했고 국민경선을 지키며 1등 노무현 바로 뒤에 2등이면서 꼴찌였던 정동영이 "노무현을 찍어달라"며 '희망돼지 아빠'로 칼바람 맞으며 전국을 누볐다. 노무현과의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경선후보 중 유일하게 노무현 옆에 서있었던 사람 그 사람은 정동영뿐이었다.
2003년. 참여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지역구도는 깨지지 않았다. 2003년도 최대의 개혁 과제는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전국정당화, 즉 신당창당이 그것이었다. 모두가 주저주저하며 뒷걸음칠 때 정동영은 맨 앞자리에서 총대를 멨다. 모두 다 겁을 먹고 정치적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동영은 많은 국회의원들처럼 우물쭈물 어정쩡하지 않았다. 몸을 던졌다. 정동영이 이끄는 9명의 결사대가 신당 창당을 주도했다. 신당에 입장은 각양각색이었다. 뒷북치며 신당에 합류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당의장 선출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간선제와 직선제. 신당의 근본 취지는 당연 직선제였다. 그것을 관철하고 직선제 당의장이 되어 지지율 1위로 끌어올리는 주인공인 정동영이 있었다.
2004년. 최대의 개혁과제는 총선 승리였다. 의회권력의 교체였다. 정동영 당의장이 되고 9%에 머물던 신당 지지율이 치솟기 시작했다. 2달간 10%-20%-30%-38%까지 고공비행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총선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당황망조했다.
결국 이들이 작당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라는 의회 쿠데타였다. 온 국민이 분노했고 저들의 시도는 국민적 저항 앞에 좌절됐다. 헌정 사상 최초로 민주개혁세력으로 의회의 권력이 교체되었다. 눈물어린 감격의 승리의 현장 맨 앞자리에 정동영이 있었다.
2005년. 최대의 개혁과제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가를 북핵문제의 해결과 6자회담의 재개였다. 세계의 눈과 귀는 한반도를 향해 있었다. 우리의 턱밑에서 엄존하고 있는 전쟁의 기제를 뜯어내고 평화구조를 정착하는 문제야말로 이 시대 최대의 숙원이요, 개혁의 과제였다.
정동영은 김대중의 통일철학과 노무현의 통일철학을 접맥한 전도사였다. 정동영은 김정일 위원장과 5시간 동안 소통하며 막혔던 남과 북을 뚫어냈다. 남과 북에 엄존하고 있던 냉전의 기제를 뜯어내고 평화의 기제를 장착하는 데 기여했다.
2006년. 최대의 개혁과제는 두말할 필요 없이 10년 동안 85%를 독점하며 지배해온 한나라당 지방권력을 심판하고 교체하는 일이다. 참여정부의 성공은 대한민국의 성공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성공은 개인의 성공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이 성공하는 문제이다.
그것을 위해 열린우리당이 성공해야 하고 당·정·청이 '한몸 공동체'가 되어 정국을 주도해야 한다. 그것을 가르는 결정적 승부처가 바로 5·31 지방선거이다. 반토막 난 지지율을 1위로 재탈환하고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 '희망 전도사'로서의 적임자는 1분만 생각하면 정동영이다.
개혁은 "개혁, 개혁"하며 하루에 열번씩 외친다고 개혁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은 잘못된 것을 고치자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져 실천하지 않고 우물쭈물 대는 자,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비겁자이다. 개혁주의자는 지나간 과거에 몸을 던져 실천하며 위기에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도전한 자에게 붙여주는 고귀한 이름표이다. 차곡차곡 쌓인 개혁적 행보에 이력서를 보고 붙여주는 이름표이다.
노무현과 정동영은 몇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결단하고 던지는 리더십'과 '버림으로써 성취하는 리더십'이 닮음꼴이다. 말로만 하는 개혁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개혁이 닮았고 그것은 성공하는 개혁이었다. 주춤주춤 물러서고 좌고우면하다 실기해서 일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쉬운 말로 소통하고 현장에서 역동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마인드가 비슷하다. 국가와 국민을 먹거리를 생각하며 미래의 효자 산업인 문화산업에 대한 열정 또한 그러하다.
현실에 실천이 없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과거의 영광은 '왕년주의'에 다름 아니다. "왕년에 내가 말이야…." 이것은 선술집에서나 하는 넋두리여야 한다. 현실 정치에 무엇을 했는가? 무슨 업적을 남겼고 어떠한 성적표를 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칙에 충실하고 그것을 과단성있게 실천했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2002년도에 소아를 버리고 대의를 실천한 정동영을 등 뒤에서 응원의 박수를 쳤지만 2006년 오늘은 당을 살리고 참여정부 성공을 위해, 다가온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앞장서서 노무현 대통령의 최대의 동지 정동영을 당당하게 응원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