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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5 장 무시무종(無始無終)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는 일이다. 깨달음이란 인간이 만든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하나의 과정이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궁극의 것이 아니라 과정인 것이다.

심득(心得)이라 말하지만 얻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허(虛)가 아니라 공(空)이다. 이미 비워있어도 없는 것이 아니다. 비우고자 할 때 이미 채워져 있는 것.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한 바 없으니 끝이 있을 수 없고…
불생불멸(不生不滅)… 난 바가 없으니 소멸하는 것 또한 없다…

태어남은 시작이 아니다. 다만 그 형체와 모양을 바꾸었을 뿐. 또한 후에 어떻게 변화해 가던 역시 그 형체만 달리할 뿐이다. 외부의 기운이던 아니면 본래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이던 역시 다를 바 없다.

어떠한 것이던 다투지 않고 동화될 수 있다면 언제든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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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전(愚牛殿).

아무리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이 머무는 전각의 이름을 이 따위로 지어놓지는 않는다. 더구나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수뇌가 머무는 전각을 이처럼 우스꽝스런 이름으로 지어놓았다면 모두가 비웃을 일이다. 어리석은 소가 머무는 집이라니….

천마곡 내에서도 가장 크고 높은 전각은 소의 형상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진짜 어리석은 소가 사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장철궁은 자신이 머무는 3층 전각을 스스로 우우전이라 불렀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어리석은 소란 뜻이었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를 어리석은 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우둔한 것처럼 보였지만 우둔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지만 절대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내에는 모두 네 명이 원형의 탁자를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다. 당새아 만이 운령의 옆에 다소곳이 서서 그녀의 입이 되어줄 뿐이어서 실내는 모두 다섯 사람이 있는 셈이었다.

“대군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대군의 계획을 모두 들었던 장철궁이 물었다. 제마척사맹을 공격하겠다는 대군의 계획은 너무나 평이했다. 아무런 계책 없이 힘으로 몰아붙이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저들은 힘을 숭배하는 자들이지만 그렇다고 뻔히 막대한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무작정 공격할 어리석은 자들도 아니었다.

“물론 아니오. 정작 저들의 숨통을 죄는 방책은 두 가지가 더 있소.”

대군은 전과는 달리 매우 느긋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일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을 때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대군은 시선을 돌려 장철궁의 옆에 앉아 있는 운령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운령소저는 이미 짐작하실 것 같은데….”

운령은 대군이 보이는 저 자신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저의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이미 그가 말한 두 가지 방책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운령은 대군과 그 옆에 앉아있는 이군(二君) 회마(灰魔)를 번갈아 가며 보다가 입을 열었다. 회마의 얼굴과 눈빛은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죽은 잿빛이었다.

“저들이 펼치고 있는 것은 삼첨진(三尖陣)이죠. 전형적인 수비위주의 진으로 정면공격은 이쪽 피해만 늘어날 뿐이에요. 하지만 삼첨진은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요.”

“저들은 산을 등지고 있다.”

삼첨진의 약점은 배후였다. 하지만 그들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을 등지고 있어 배후로 인원을 투입하기 어렵다. 운령은 장철궁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말을 이었다.

“저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우회하면 그들의 배후를 공격하지 못할 이유도 없어요. 절벽과 절벽사이에 줄을 연결해 건너가고 그 쪽 절벽에 줄을 고정시켜 이동한다면 그들의 배후로 진입할 수가 있죠. 많은 인원도 필요 없을 거예요. 약 삼십 명 정도의 고수들을 투입한다면 충분히 교란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 천마곡의 경계를 위해 그런 방법을 사용해 절벽에 경계인원을 배치한 적도 있었다.

“줄을 타고 이동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 저들이 그냥 내버려 두겠느냐?”

“아마 대군께서는 저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또 한 가지 방책을 준비했겠죠. 바로 화공(火攻)일 거예요. 천막은 불에 잘 타기도 하지만 연기도 많이 날 거예요. 더구나 저들이 줄을 타고 건너는 것을 발견하더라도 특별한 대책은 세우지 못할 거예요. 전면에서 실혼인들이 공격을 하고, 천막에 불이 붙으면 우왕좌왕하겠죠. 유일한 방어수단이 될 천궁문의 단세적이 죽었어요.”

단세적이 죽은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 줄을 타고 절벽을 건너는 인물들을 죽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활이다. 하지만 단세적이 죽은 지금 천궁을 사용할 인물은 없었다. 단세적의 죽음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풀어놓은 수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보다 더 큰 이유는 공격을 방해할 인물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였다.

“역시 운령소저는 하늘도 탄복할 지혜를 가지고 계시구려. 정말 감탄했소.”

그들이 계획한 두 가지 방책을 이미 운령이 꿰뚫어 본 것이다. 대군이 정말 감탄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겉과는 달리 그는 내심 긴장했다. 운령은 너무 똑똑하다. 이미 두 가지 방책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듯이 자신들만의 내심도 꿰뚫어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삼군(三君)의 머리에서 나온 계책이겠군.”

장철궁 역시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삼군은 절대구마의 후인 중 세 번째 뇌마(腦魔)를 지적한 말이었다. 그 정도의 비상한 계책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자는 그 뿐이다.

“예정했던 대로 지금 곧 공격을 하시겠지요?”

운령이 대군과 이군을 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공격을 할 것이냐가 아니라 당장 공격을 실행하라는 말투였다. 대군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재촉하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운령은 자신들의 내심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떠한 대비를 해놓았을지는 모르지만 이미 완벽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물론 그렇소. 허나 공격하기 전에 먼저 끝내야 할 일이 있소.”

대군은 운령의 시선을 피하며 장철궁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장철궁이 갑자기 광소(狂笑)를 터트렸다.

“핫핫핫… 바로 본 곡주를 제거하는 일 말인가?”

언제나 우둔해 보이며 뒤룩거리던 장철궁의 두 눈이 정지하며 갑작스럽게 광망스런 불꽃이 일렁거렸다. 시퍼런 불꽃이 쏘아 나오는 듯 했다. 대군의 얼굴에 은은한 두려움이 떠올랐다. 언제나 그랬다. 두 번의 완벽한 패배는 대군으로 하여금 장철궁의 저 눈빛에 언제나 주눅이 들게 만들었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아니 두려움을 가지면 안 되었다. 그는 애써 두려움을 지웠다. 자신들의 꿈을 펼치기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상대가 장철궁이었다.

“이미 알고 계셨구려.”

대군이 입가에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철궁을 마주보는 시선에도 비웃는 듯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이제 그는 장철궁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법이야. 연혼마공(烟魂魔功)을 대성한 모양이군. 이제 자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인가?”

“흐흐… 기회는 당신이 나에게 강요한 것이오. 나는 굳이 주어진 기회에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없소.”

음산한 미소와 함께 그의 앞에 놓여진 찻잔이 둥실 떠오르더니 쾌속하게 장철궁의 가슴을 노리며 쏘아갔다. 상체를 숙이고 손을 뻗으면 닿을 가까운 거리였기에 쏘아간 찻잔은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장철궁의 가슴을 격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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