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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고향 하늘은 달랐다. 비행기 세 대가 언제 지나갔는 석양을 받아 붉게 방귀를 뀌고 지나갔다. 무지개보다 더 반가운 이 광경을 참 오랜만에 보아서 기분이 좋았다.
역시나 고향 하늘은 달랐다. 비행기 세 대가 언제 지나갔는 석양을 받아 붉게 방귀를 뀌고 지나갔다. 무지개보다 더 반가운 이 광경을 참 오랜만에 보아서 기분이 좋았다. ⓒ sigoli 고향
설을 맞아 귀성행렬에 합류했다. 설과 추석 때마다 당하는 일이지만 하루하루 턱밑으로 명절이 다가오면 판단력이 흐려져 몇 시간만 늦추든지 앞당기면 대여섯 시간이면 될 것을, 정확히 가장 막히는 시간을 택해 고향으로 간다. 참으로 영험하지 않은가? 족집게가 따로 없다.

‘이번에는 아니겠지, 돌아가면 되겠지, 연휴가 짧으니까 나서지 않을 사람도 많을 거야, 고속도로와 국도가 추가로 뻥뻥 뚫렸으니 큰 어려움 없이 갈 수 있겠다’는 기대를 안고 먼 길을 나선다. 부푼 꿈을 안고서.

이번 설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휴 전날인 금요일 오후 6시에 집을 나섰다. 그도 동생과 아내에게 어떻게든 1시간 정도 근무시간을 단축하자고 부탁해 남들보다 시간을 조금 벌었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흡족했다.

라디오에선 50km가 밀린다느니 70km 이상 길게 줄이 서 있다고 한다. 호남으로 가는 경부, 서해안, 중부 어디를 타도 결국 막히고 만다는 방송소리에 서해안고속도로와 나란히 가는 39번국도로 가면 수도권을 조금 절약하여 빠져나갈 수 있겠다 싶어 화성-평택-아산으로 길을 잡았다.

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장수IC에서 빠져 인천대공원을 지나 영동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군포까지는 시원하게 잘 뚫렸다. 아산으로 향하는 길은 평소 밀리지 않는 구간이다. 미리 이 코스로 가겠다는 계산인지라 약간 밀린다는 소식에 으레 그러려니 하고 국도로 진입했다.

웬걸?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왕복 4차선 도로 남행은 발안까지 거북이 걸음이었다. 그때 동생이 초를 치는 말을 한다. 말이 12시간이지 홀로 운전을 하자면 이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아침 4시 40분에 일어나 고향신문 편집과 온종일 글을 썼다.

“오빠 이러다 12시간 걸리는 거 아녀?”
“설마 그러겠냐? 어딜 가나 막히니까 그냥 가지 뭐. 천안 지나서 공주쪽 23번 국도만 타면 논산-익산까지는 금방이야.”

도착하자 날이 새서 떡국을 먹고 한 숨 잤다. 깨어서 화목보일러에서 잉걸을 꺼내 고기를 구워먹던 것이 설날 아침에 먹었던 음식 나눔이 다여서 무척 아쉬웠다. 감자탕을 먹고 가라는데 일정을 앞당겨 서둘러 고향을 떠났다.
도착하자 날이 새서 떡국을 먹고 한 숨 잤다. 깨어서 화목보일러에서 잉걸을 꺼내 고기를 구워먹던 것이 설날 아침에 먹었던 음식 나눔이 다여서 무척 아쉬웠다. 감자탕을 먹고 가라는데 일정을 앞당겨 서둘러 고향을 떠났다. ⓒ sigoli 고향
설마는 진짜 사람을 잡는가 보다. 경기와 충청 경계인 아산만을 넘기까지 7시간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졸리는 눈을 비벼가며 창문을 열고 바짝 정신을 차리며 침침한 국도를 달렸다.

천안을 지나면서부터 속도를 낼 수 있을 무렵엔 녹초가 되었다. 지레짐작으로 논산까지 1시간 그곳에서 전남 곡성 옥과까지 1시간 30분이면 충분히 도착하겠다는 결론에 이르자 다시 힘이 났다.

논산에서 다시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오히려 악화되었다. 기운도 빠지고 머리가 멍해질 무렵 차가 옴짝달싹하지 않고 멈춰있다. 여산휴게소까지는 불과 4~5km지만 논산천안고속도로에서 내려온 차량과 합류하는 지점이다.

대체 거리가 얼마인지 궁금했다. 지도를 꺼내 운전대 위에 놓고 잠시 본다는 것이 그만 앞차 범퍼를 살짝 들이받고 말았다. 인지능력이 떨어진 게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길가로 차를 빼서 함평까지 간다는 분에게 2만원으로 합의를 보고 쓴맛을 다셨다.

차를 자세히 보니 부식이 한참 진행되어 녹이 엉겨 붙어 있었는데 울고 싶은 놈 뺨 때려준 꼴이었으니 세밑이라 기분 좋게 끝냈고 이 정도면 과하다 싶지 않아 잊기로 했다. 통행료 아껴서 적선했다고 보면 되지 않은가.

휴게소에 들러 잠시 휴식, 다시 출발하여 정읍휴게소를 지나쳤다는 걸 호남터널이 나온 뒤에야 알았다. 이제 잘 가면 곧 광주요금소지만 도저히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미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었다.

30여 분 백양사휴게소에서 눈을 붙이고 고향을 향해 마지막 힘을 냈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았지만 시력이 회복돼 운전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집에 도착해보니 6시 40분이다. 장장 12시간 40분을 운전대를 부둥켜안고 왔다.

아무 도리도 못하고 올라온 명절-아쉬움 가득, 불만은 더해

형제와 이렇다할 이야기 한 번 나누지 못하고 피곤이 풀리지 않을 때 다시 운전을 시작하였다. 처가에서는 너무나 노곤하여 1시간여 낮잠을 자고 올라오는데 연로하신 장모님께서 하룻밤 자고 가지 않는다고 그렇게 서운해 하셨다. 1년에 보통 열 번 이상 뵈었어도 아쉬워하니 낸들 미안할 뿐 방법이 없었다.

설 전날 젤 오른쪽에 있는 친구집에 갔다가 두 친구를 부르니 두말 않고 나왔다. 한 친구는 사투리연구가, 또 한 친구는 키위박사다.
설 전날 젤 오른쪽에 있는 친구집에 갔다가 두 친구를 부르니 두말 않고 나왔다. 한 친구는 사투리연구가, 또 한 친구는 키위박사다. ⓒ sigoli 고향
동생으로서 하루 응당해야할 일이 농촌을 지키고 있는 형님 내외를 위로하는 것과 건강치 못한 장인장모님께 자식된 도리 한 번 해보는 것 아닌가. 올핸 마침 주말에 설이 매달려있어 갖가지 궁리를 해도 묘수가 나오지 않았다. 정말이지 휴일을 재조정하자는 운동을 벌여서라도 바꿔야겠다는 마음뿐이다.

올라올 때는 설 당일에 고향을 출발하여 처가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5시 무렵 떠나 13번 국도로 금산까지, 17번 국도를 타고 경기도 이천 일죽까지 와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오니 5시간 남짓 걸려 무사히 도착했다. 몸 풀기로 1시간을 더하면 6시간 넘게 걸린 셈이니 선방하였다.

고향 오가는 길 아니라면 내게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싶게 스스로가 대견했다. 우린 이렇게 언제나 밀릴 줄 알면서도 명절에 고향에 간다.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계시지 않아도 형제와 시골마을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못할 짓,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척척 해내니 모성과 함께 우리를 끌어당기는 인력(引力) 앞에 매년 두 번은 속수무책이다.

명절 교통 대책, 무대책이 상책이라지만 이젠 포기 단계

1년에 더러 지방을 다녀오다 심하게 밀리면 다시는 이런 교통지옥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얼른 고향으로 이사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한다. 남쪽으로 일시에 몰렸다가 하루 지나고 나서는 거꾸로 북행 숨통이 콱 막히고 마니 대체 뭐란 말인가.

고향마을에서 유일하게 유심히 본 건 이 서리꽃이다. 죽지 않고 겨우내 살아있는 찔레 잎에 엉긴 게 참 정겹다.
고향마을에서 유일하게 유심히 본 건 이 서리꽃이다. 죽지 않고 겨우내 살아있는 찔레 잎에 엉긴 게 참 정겹다. ⓒ sigoli 고향
서울, 인천, 경기도에서 살고 싶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서울이 명절이나 휴가 때처럼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도 한두 번 생각한 것이 아니다. 고 정주영회장이 2층 고속도로를 건설한다고 할 때 내심 지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서울에서 출발한 귀성, 귀향을 예로 든다면 하행은 그대로 하고 상행선 중 텅텅 비어있는 반대편 도로를 한차선만 기존대로 운영하고 나머지 한 차선은 남겨서 안전지대로 쓰고 나머지 한두 차선을 고향 가는 길로 내주면 좋겠다.

도로구조 때문에 속도를 내기 어렵다면 속력을 20km 가량 하향조정하여 더디게 가도록하면 훨씬 고향에 일찍 도착하여 몸과 마음이 푹 쉬고 남녀구분 없이 명절을 준비하고 음식을 나누고 친지와 어릴 적 동무를 만나 즐거운 한때를 누리리라.

내가 고생한 내역을 소상히 꺼냈던 데는 명절에 대한 기본 개념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다. 난 이제 교통대책 잘 세워달라고 하고 싶지 않다. 간선(幹線) 고속도로를 제아무리 잘 내도 2, 3년이면 포화상태가 되고 마니 멀쩡한 국토 망가지기나 할 뿐 개선의 여지가 없다. 도로가 차량이 늘어가는 추세를 따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기실 교통대책은 무대책이 상책이다. 속수무책이 한두 해라면 모르겠다. 대책을 세워도 변화가 없다. 반세기 동안 당해보고도 으레 명절이니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경찰에게 맡겨서는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 없이는 유례를 찾을 수 없게 일시에 몰리는 현상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게 명확해졌다.

명절 일주일이 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자

달력을 꺼내보고 이웃나라 사례를 찾아봐야겠다. 내 관심사는 명절을 하루 더 늘려달라는 게 아니다. 작년 추석 때 나온 이야기지만 향후 7, 8년간은 해년마다 명절이 3일 내외라는 말도 들렸다. 이러다가 10년 이내에 명절은 없어져야할 날로 여겨지지 않을까 모르겠다. 각자 소가족 단위로 따로 쇠다가 없어도 되는 날로 바뀌지 않을까?

든든히 먹기 위해 떡국을 먹고나서 아무 반찬이나 집어넣고 둘둘 비볐더니 안동헛제사밥에 비견하지 못할 꿀맛이었다.
든든히 먹기 위해 떡국을 먹고나서 아무 반찬이나 집어넣고 둘둘 비볐더니 안동헛제사밥에 비견하지 못할 꿀맛이었다. ⓒ sigoli 고향
해마다 고향은 비어가고 농촌은 피폐해지고 있다. 70년대 80년대 초반까지 발 디딜 틈이 없도록 명절 때마다 북적거렸던 그때 상황은 아니더라도 요즘같이 썰렁한 분위기에선 그나마 몇 남지 않은 아름다운 전통이 곧 사라지고 말겠다는 생각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설은 무엇인가? 설은 섣달그믐날부터 정월초하루인 설날을 지나 정월대보름까지 근 보름 이상 음식을 마련하여 가족이 모여 함께 나누며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우리의 전통 놀이를 즐기며 덕담을 나눴던 소중한 문화다.

음력 1월 1일 새해 첫 날은 중국과 베트남에 우리나라까지 세 나라가 버리지 않고 지금껏 지켜낸 아름다운 자산이다. 베트남은 근 일주일인데 중국 춘절(春節) 공식 휴일은 2, 3일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도 공직자는 대개 일주일, 시민은 많으면 15일까지 휴가를 받아 고향에 다녀온다고 한다. 땅이 드넓어서 또는 산업화가 덜 진전되어 그렇다고 하기엔 퍽이나 길지 않은가?

그러면 동아시아 몇몇 국가에 한정된 일이라 할 것이니 더 멀리 눈을 돌려보자. 휴가가 근 한 달까지 이어지는 서유럽이 부럽다. 미국은 성탄절 연휴가 이틀이지만 실제로는 새해가 시작되는 1월 1일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그들은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을까?

대안이 없지 않다. 우리도 행정자치부가 주관부서라면 '국무조정실' 산하에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같은 조직을 활용하여 민관이 합동으로 매년 새해가 시작되기 몇 달 전에 공휴일과 명절에 대해 의견을 수렴하여 조정하면 어떨까?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 스승의 날을 5월 첫째주 토요일 '가족의 날'로 정해 옮기면 이중삼중 지출로 인한 경비도 줄일 수 있다. 여기에서 남은 평일에 걸린 하루를 명절로 조정한다. 현충일도 6월 첫째 토요일로 일정하게 한다. 제헌절은 7월 셋째주말로 하면 되고 사월초파일이나 성탄절은 각 교단별로 행사를 갖도록 주말을 이용하면 될 것이다.

합리적인 방식과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토요일을 일단 활용하고 며칠간 절약된 공휴일을 추석과 설에 적당히 배분하면 최소 5일에서 일주일까지도 쉴 수 있지 않을까. 정히 쉬는 날이 많다면 명절 전과 후 각각 한 주 토요일엔 근무를 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하다. 시민 거개는 기꺼이 동참하리라 생각한다.

아직도 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사흘 가운데 오가며 이틀을 차에서 지냈다. 기름값도 만만치 않게 소비되었다. 내 작은 바람이 이뤄진다면 나는 참 고향에 가서 할 일이 많다. 가까운 도시에서 영화도 한편 보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 싶다.

백아산에서 지리산까지 빨치산들이 다녔다던 루트를 찾아보고도 싶다. 가족끼리 오붓하게 술 한 잔 기울이고도 싶고 처가에서 푹 퍼질러 있다가 몸이 근질거리면 밭에 퇴비라도 내주고 올라와 하루쯤 쉰 뒤에 일상으로 몰입하여 열심히 살고 싶다.

음식 장만할 시간도 없이 후딱 지내고 도망쳐 와야 하는 명절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명절과 휴식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머니 품같이 포근한 게 고향 아니던가.

제사와 차례를 지내고 나서 온갖 생선에 육고기, 전과 적, 갖가지 나물에 김치 몇 가닥 썰어 넣고 끓여먹던 잡탕 맛이 일품인데 속풀이에 그만이고 남은 음식 처리하기에도 좋다. 이 맛난 걸 시골에서 먹지 못하고 형수님이 조금씩 나눠준 걸 서울에서 끓여 먹었다.
제사와 차례를 지내고 나서 온갖 생선에 육고기, 전과 적, 갖가지 나물에 김치 몇 가닥 썰어 넣고 끓여먹던 잡탕 맛이 일품인데 속풀이에 그만이고 남은 음식 처리하기에도 좋다. 이 맛난 걸 시골에서 먹지 못하고 형수님이 조금씩 나눠준 걸 서울에서 끓여 먹었다. ⓒ sigoli 고향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만들고 있다. 아쉬움을 시골아이와 함께 달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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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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