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건릉
건릉 ⓒ 한성희
사도세자와 정조의 융건릉은 왕릉 연재를 쓰는 나로서는 이렇게 힘들게 쓴 기사가 없었다고 한탄할 정도로 힘든 역사조명이었다.

사도세자의 드라마틱한 죽음과 정조의 효심, 노론과 왕의 상호 세력 견제, 근대로 넘어오는 계몽군주이자 개혁군주인 정조의 치적 등이 맞물리면서 '이걸 어떻게 요약해서 왕릉연재에 다 쓰냐'는 탄식부터 나왔다.

정조라는 군주는 자료를 찾고 찾을수록, 공부를 거듭하고 거듭할수록 위대했다. '세습왕조에 어떻게 이런 군주가 나올 수가?' 하는 경탄과 탄성이 거듭될수록 정조를 적은 매수의 글로 쓸 수는 없다는 내 고민도 거듭됐다.

건릉
건릉 ⓒ 한성희
왕릉연재를 하면서 가장 힘들 때가 한 시대를 주도한 왕을 한정된 글로 요약할 때다. 500년 역사와 그 시대를 주도했던 27명의 국가경영자를 일방적인 잣대로 본다는 것 역시 무리라는 것을 절감했다.

현재의 역사도 움직이고 있지만 과거의 역사 역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과거사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한다.

이런 고민을 한참 하고 난 뒤 정조의 재조명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평가서가 나오고 있으므로 역시 내 잣대로 왕릉으로 눈을 돌려보는 것이 현명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이 갈등은 조선이 정조 이후로 급속도로 몰락한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정조가 그렇게 갑작스레 죽지 않았다면 하는, 냉정하게 역사를 바라보지 못하는 못난 내 아쉬움에서 이런 고민이 돌출했다고 봐야겠다.

융릉보다 석물이 뒤떨어지는  건릉.
융릉보다 석물이 뒤떨어지는 건릉. ⓒ 한성희
조선조의 위대한 왕을 꼽으라면 세종과 정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세종과 정조 중 누가 더 위대한 왕이냐는 어리석은 비교는 금물이다. 조선전기인 세종의 시대와 정조의 시대는 비교하는 정치 기준이 다르다. 흔히 조선 500년을 같은 맥락으로 보는 시선부터 바꿔야 한다.

세종은 태종의 비호 아래 자신의 이상대로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절대군주의 권력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정조는 대신들이 움켜쥔 병권을 되찾아오는 데만도 15년 이상 걸렸다.

정치 발전 역사의 정석으로는 대신이 병권을 쥐고 왕권이 약해진 것이 발전된 정치형태겠지만 문제는 이 신권이 쥔 권력이 민주정치의 발판이 아니라 가문만의 기득권을 세세손손 누리려는 권력이었다는 것이다. 정조를 알려면 조선 후기의 이런 정치환경부터 이해해야 한다.

민족문화의 금자탑, 신도시 화성

화성과 화산 아래 자리잡은 융건릉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함수관계에 있다. 또한 이곳에는 정조의 꿈과 이상이 동시에 담겨있다.

화산(花山)을 주산으로 삼아 부자가 나란히 누워 잠든 융건릉과 정조의 정치적 위용을 상징하던 화성 사이에는 황구천이 흐르고 있다.

정조는 "옛날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華)자와 화(花)자는 서로 통용된다"며 화성(華城)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화산의 화(花)와 화성의 화(華)는 같다는 의미다.

정조는 조선 후기 최초의 자급자족 상업도시이자 신도시인 화성을 완공했다. 사도세자의 융릉 천장 직후 축조하기 시작한 화성은 정조의 효심을 바탕으로 11년 동안 추진한 끝에 이룩한 민족문화의 찬란한 금자탑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십 수년 후(1804년 이후) 화성을 세운 뜻이 저절로 밝혀지리라'던 자신의 말을 이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정조는 십 수년 후에 세자(순조)에게 전위하고 독자적인 왕의 병권과 경제기반을 갖춘 상업도시 화성행궁으로 은퇴하겠다는 비원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저 석탑에  못다 이룬 정조의 한이 서려있을까?
저 석탑에 못다 이룬 정조의 한이 서려있을까? ⓒ 한성희
정조는 즉위 초부터 훈척과 노론 벽파세력이 왕권을 제약하고 혁신정치를 무력화하려는 데 맞서 싸워야 했다. 고질화된 붕당의 폐습을 없애고 탕평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을 현안 과제로 삼은 정조는 정치 안정을 확보하면서 왕조중흥과 문화정치를 이룩하려 했다. 그의 정치 이상이 담긴 역사적 사업이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조했던 무리를 벽파라 했고 같은 노론이지만 반대한 무리를 시파라 했다. 시파에는 남인이 포함됐으며 이들이 정조의 이상정치에 등용됐던 인재군이었다. 정조의 죽음으로 벽파이자 정적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가 길러놓은 인재들은 몰살당했고 정조의 이상향이었던 화성은 시들어버렸다. 그리고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근대로 발돋움하려던 조선은 뒤로 후퇴해버리고 만다.

종기로 승하한 정조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는 24년간 재위한 후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승하한다. 조선 후기부터 왕의 독살설이 나오기 시작했고 정조 역시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후대에 회자됐다.

당시 실록을 살펴보면 정조의 죽음은 6월 14일 가벼운 종기로 내의원 서용보를 불러 진찰을 받는 데서 시작한다. 정조는 이날 진찰을 받은 후 의관 서용보를 교체해버리고 약방문을 직접 불러주고 약을 짓게 했다. 등에 난 가벼운 종기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겨우 보름도 걸리지 않았다.

그 보름 동안 실록에는 정조가 일일이 약방문을 직접 지정해주고 달여 오라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정조는 의원과 약과 탕제를 손수 의논했고 어떤 약을 쓸 것인지 몇 번 먹을 것인지까지 결정했다. 이 기록은 정조의 의학실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왕실의원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상한 것은 정조가 여러 번 진찰을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고름이 다 빠지고 열이 내려 차도가 있을 만하면 다시 도지는 정조의 등창종기는 불과 보름만에 왕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결국 왕은 11세 어린 왕세자에게 대보를 넘기고 숨을 거두고 만다.

건릉 금천교에 냇물이 얼어붙었다. 정조의 죽음 직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벽파가 집권하면서 조선의 르네상스도 얼어붙고 말았다.
건릉 금천교에 냇물이 얼어붙었다. 정조의 죽음 직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벽파가 집권하면서 조선의 르네상스도 얼어붙고 말았다. ⓒ 한성희
정조의 꿈과 비원은 49세, 한창 일할 나이에 돌연한 죽음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정조와 효의왕후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의빈 성씨가 정조6년(1782~1786) 문효세자를 낳았지만 세자는 일찍 죽었다. 40이 다 되도록 후손이 없던 정조가 1790년 융릉 천장 직후 수빈 박씨에게서 얻은 아들이 순조다. 38세 늦은 나이에 순조를 얻은 정조는 천장한 아버지의 무덤 발복 덕분이라고 기뻐했다.

정조가 죽은 지 5일 후 어린 순조가 등극한다. 순조가 등극하자마자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는 그날로 당장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한다. 윤행임을 도승지로, 박준원을 어영 대장으로, 황인점 등을 종척의 집사로 삼는 교지를 내린 정순왕후는 잇달아 심환지를 영의정, 이시수를 좌의정, 서용보를 우의정으로, 이만수를 예조 판서, 이득신을 공조 판서로 바꿔치운다. 이렇듯 숨가쁜 인사가 7월 4일 하루만에 일어났다. 벽파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아버지 곁에 잠든 정조

원래 정조가 묻힌 건릉(健陵)은 현재 자리가 아니다. 국장을 주도했던 정순왕후와 벽파무리는 11월 6일 현융원(융릉) 경내 옛 수원부 강무당(講武堂) 터가 길지(吉地)라면서 정조를 이곳에 장사지낸다. 수렴, 충렴과 함께 무당터, 병영터 또한 풍수에서는 흉지로 친다. 강무당이란 군사들이 훈련을 하던 병영터다.

<정조선황제건릉 효의선황후부좌>
<정조선황제건릉 효의선황후부좌> ⓒ 한성희
조선의 계몽군주, 위대한 국왕 정조는 벽파에 의해 병영터 흉지에 묻히게 된 것이다. 풍수에 박식한 정조가 이 꼴을 봤으면 가슴을 치고 한탄했으리라.

순조 21년(1821) 3월 9일 효의왕후가 69세로 창경궁 자경전에서 승하하자 정조의 흉당이 거론됐다. 이어 9월 13일 효의왕후의 장례를 치르면서 강무당 자리에 있던 건릉을 옛 수원부 구 향교 터로 천장해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했다.

융릉과 직선 거리로 50m 떨어진 정조의 능상에는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있다. 사도세자는 병풍석만, 정조는 난간석만 둘러 부자가 모자라는 부분을 서로 보충해주고 있다. 정겨움이 느껴진다.

정조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나 광무3년(1899)년 정조로 바뀌었고 선황제(宣皇帝)로 추상된다. 사도세자의 후손이었던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태조 이성계를 고황제로 추존한 것 외에 사도세자부터 황제로 추존하는 절차를 밟는다.

어찌 보면 고종이 사도세자부터 조선 왕조를 다시 수립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춘 고종의 이런 절차는 일말 이해가는 일이나 정조 이후 기울어진 국운을 회복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정조와 같은 국가경영자가 현대에 나타난다면? 그때 정조 주위를 포진했던 노론벽파 세력 같은 무리들이 없었다면?'

어리석은 해답을 찾는 내게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산신석이 제왕의 자리로, 그 위에 비친 목책 그림자는 왕을 겨누는 창으로 보인다.
산신석이 제왕의 자리로, 그 위에 비친 목책 그림자는 왕을 겨누는 창으로 보인다. ⓒ 한성희
겨울바람이 벌거벗은 나뭇가지 사이를 스산하게 쓸고 지나가는 건릉 능상 위에서 화성 쪽을 어림잡아 바라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내려왔다. 정자각 동편에 있는 산신석에 목책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산신석에 드리운 날카로운 창 그림자를 보며 왕의 자리가 저렇게 위태롭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목책 그림자는 왕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였고 산신석은 세자시절부터 주위의 모략을 받고 죽음의 위기를 넘겨가며 왕위에 올랐으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아까운 생을 마감한 정조로 보였다.

겨울 까치 몇 마리가 양지바른 제왕의 무덤가 금빛 잔디에 내려앉아 한가롭게 먹이를 쪼고 있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