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북핵 해결 의지 애초부터 없었나?
실제로 부시 행정부가 공식적으로는 '북핵 불용'을 내세우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북핵 대비'에 무게 중심을 둬왔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 실세로 올라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이미 2000년 <포린어페어> 지 1/2월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 "향후 미국은 북한, 이라크, 이란과 협상을 하기보다는 이들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군사력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며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의 기본 방향을 밝힌 바 있다.
또한 타결 일보직전까지 갔던 미사일 협상을 전면 중단시키면서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근거로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군사 패권주의의 추구를 위해 '북한위협론'을 활용하고자 했던 의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10월 고농축 우라늄(UEU) 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충돌이 발생한 이후 부시 행정부 고위 관리들의 발언들도 이와 같은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당시 국무장관인 콜린 파월은 2002년 12월 29일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추가적인 핵무기 보유에 나설 경우 정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미리 판단하지 말라, 북한이 핵무기를 다른 나라로 수출한다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금지선(red line)"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북한의 주민들은 굶주리고 있고 에너지도 없으며 경제도 붕괴되고 있는데, 2∼3개의 핵무기를 더 갖고서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 역시 2003년 3월 초, 미국 언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그는 "북한의 핵무장에 대해 불안해하는 아시아 동맹국들을 어떻게 안심시킬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MD 배치를 가속화하겠다"고 답변했다. 이는 북한의 핵무장을 막겠다는 것보다 MD 배치를 통한 대응에 무게중심이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북핵 문제 재발을 계기로 MD 구축에 박차를 가해왔다.
그러자 미국 언론들도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무장 저지보다는 그 파장의 확산을 방지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보도를 잇따라 내놓았다. 2003년 3월 5일자 < LA타임즈 >는 "부시 행정부는 아마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북한 핵무장에 따른) 지정학적 결과를 다루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즈>도 2003년 5월 5일자에서 미국 안팎의 소식통을 인용해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무장 저지 목표를 철회하고 핵 물질 및 기술의 해외 이전 방지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 응한 부시 행정부의 고위 관리는 "부시 대통령이 우려하는 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북핵에 대한 부시 행정부 입장은 '악의적인 무시'
이같은 보도를 종합해보면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핵무장 시도에 대해서는 '악의적인 무시'를 하면서 핵 물질 및 기술의 외부 유출을 막고, 북한의 핵무장에 대비한 군사력 증강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에 대북한 비타협주의와 평화적 해결이라는 상호모순된 원칙을 견지하면서,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구상(PSI) 및 MD 구축에 박차를 가해왔다.
부시 행정부가 평화적 해결을 공언한 것에는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동북아 국가들의 반대로 인해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이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점도 고려되었지만, 이라크 침공 및 점령 계획에 차질을 가져올 수 있고, 북한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군비 증강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북핵 문제에 대해 '악의적인 무시'를 해왔다는 것은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시와 북핵 문제를 상의한 한 고위 관리는 2003년 5월 뉴욕타임즈를 통해 부시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소개했다.
"북한은 우리를 흥분시켜서 관심을 갖게 하려고 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겠다. '당신들은 굶주리고 있다. 당신들을 플루토늄을 먹고 살 수 없다'고…."
북핵 문제를 바라보는 부시 행정부의 '굴절된 시각'은 상대적인 온건파로 분류된 리처드 아미티지의 발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1기 때 국무부 부장관을 역임한 아미티지는 2005년 2월 28일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북한과의 협상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북핵 문제는 PSI와 제재를 통해 긴 시간을 가지고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가 노리는 것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한 초기 발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위에서 소개한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부시 행정부는 북핵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북핵 문제의 '활용' 및 '대비'에 주안점을 둬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이 타당성을 갖는다면, 6자회담은 제스처로서의 의미를 크게 벗어날 수 없고, 이에 따라 북핵 문제의 게임의 법칙은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북한이 핵무장을 할 경우, 부시 행정부는 그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클린턴 행정부 때 이미 1-2개의 핵무기를 갖고 있었고, 한국과 중국의 대북강경책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북한은 물론, 클린턴과 한국 및 중국에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발을 빼보려는 속셈인 것이다.
또한 부시 행정부는 득실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북핵 게임'은 해볼 만하다는 판단을 갖고 있을 공산이 크다. 북한의 핵 물질과 기술이 외부로 이전되는 것을 '금지선'으로 설정해 이를 봉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론을 억제할 수 있다면 부시 행정부로서는 실보다 득이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다. 먼저 북한의 핵무장에 따라 한국과 일본 내에서 제기될 수 있는 핵무장론은 핵우산 강화를 포함한 안보공약의 강화를 통해 억제할 수 있다. 이는 거꾸로 한국과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를 높히게 함으로써 21세기 패권전략의 일환으로 추진해온 동맹 강화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실제로 북핵 문제는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재편하는데 활용되어왔다.
둘째로 '북한위협론'의 활용이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 등 이른바 '악의 축'들에게는 억제력이 통하지 않는다며 선제공격을 공식 채택한 상황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MD 구축 및 지하시설 파괴용 소형 핵탄두 개발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요격용 지상배치 MD는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고 있고, 소형 핵탄두 개발 예산은 전액 삭감되었다. 북한의 핵무장은 이러한 무기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은 요인이 될 것이다. 아울러 한국과 일본에 대한 무기수출을 통해 짭짤한 수익도 올리고 있다.
끝으로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무장을 북한의 붕괴나 정권교체를 유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 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폭정의 종식"을 통한 "자유의 확산"을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은 2기 부시 행정부는 북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는 한편, 북한의 인권 문제와 위조지폐 등 불법적인 거래를 집중적으로 문제삼으면서 비군사적, 혹은 저강도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 체제의 취약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김정일 정권을 굴복시키거나 붕괴를 앞당길 수 있다는 목적을 띠고 있다고 봐야 한다.
노무현 정부의 '선물공세'는 짝사랑
이처럼 부시 행정부가 애초부터 '북핵 해결'보다는 '북핵 활용 및 대비'에 무게중심을 둬왔다면, 북한의 '핵 카드'와 남한의 '한미공조' 역시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북한은 핵 시위를 통해 부시 행정부와의 담판을 추구해왔지만,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해 '악의적인 무시'로 일관해왔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내심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바라면서,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 전략적 유연성 수용 등 부시 행정부가 원하는 것을 거의 다 들어주었다. '선물공세'를 통해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바꿔보겠다는 것이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짝사랑'임이 드러나고 있다.
북한의 '핵 시위'도, 남한의 '선물공세'도 통하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는 부시 행정부가 북핵 해결을 사활적인 이해관계로 생각하지 않고, 해볼 만한 게임으로 인식해왔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이는 남북한 모두 기존의 대미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